클래식장편소설 디누2부1권 13 사라으이 색깔은블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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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은 타블로이드 판 신문 한 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연예인들 각종 뒷소문에 대한 자극적 기사들로 가득 찬 전형적인 황색 저널이다.
'천재들의 대결: 지네트가 아녜스의 남자를 빼앗다.'라는 야비한 고딕체 활자가 타이틀로 박혀 있었고, 타이틀 아래 머리를 맞대고 환담하는 정우와 지네트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나경은 한동안 턱을 가슴에 붙인 채 사진만 뚫어지게 바라보다 신문을 구겨 패딩 주머니에 넣고 벌떡 일어섰다. 맹렬한 기세로 집 밖으로 나선 나경의 발길이 독서실을 향했다. 정우가 있는 곳.
'아니야!'
나경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최나경! 뭘 바랬던 거야? 넌 정우가 침체되어 있었을 때나 어울리는 상대였어. 봐! 정우는 다시 디누라는 이름을 되찾으려 해. 이제 네 선을 넘었어. 넌 정우가 아녜스라는 천재에게서 지네트라는 천재로 가는 도중에 잠시 쉬어 간 벤치였어. 저 저질 기사에서도 언급조차 안되는.'
갑자기 벤치라는 단어가 가슴을 찔렀다.
'그래, 벤치! 어차피 가망 없었잖아? 천재는 천재끼리. 하지만 외롭고 힘들어 하던 정우가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는데 내가 보탬이 된 게 조금은 있을 거야. 그걸로 충분해. 내가 왜 질투를 해? 내가 왜 속상해? 언제 커플이기는 했어? 손 한 번 잡아 본 게 전부였잖아?'
나경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굳센 걸음을 옮겼다. 독서실 건물 입구를 들어서려는데, 억센 손아귀가 팔을 잡아챘다. 비명을 지를 뻔한 나경의 눈에 마치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같은 엄숙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정우가 보였다.
"드디어 왔네."
정우의 무거운 목소리가 나경의 귀를 흔들었다.
"응."
영혼 없는 대답.
"날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날도 추운데 수고했어."
냉랭한 대답.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이제 그런 수고 안 해도 돼. 널 안 볼 거니까. 그동안 즐거웠어. 그만 가야 하니까 이제 그 손 놔줄래?"
"아니, 절대 못 놔.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는데 그건 다 오해야."
정우가 더 강하게 팔을 움켜쥐었다. 나경이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신문을 집어 던졌다.
"오해? 오해라고? 기가 막혀서. 이걸 보고도 오해라고?"
사진을 보는 순간 정우의 얼굴이 뭉크의 그림처럼 일그러지며 나경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게 뭐야? 어떻게?"
"클래식 안 듣는 사람도 지네트는 알아. 월드 스타에다 재벌 3세잖아? 싸구려 기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정도는 생각해야지? 아무리 한물 갔다 쳐도 너도 언제든 기자들 먹잇감 될 수 있는 위치라는 것도 생각하고. 아, 짜증 나. 내가 왜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거야?"
나경이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타이틀 한번 멋지다. 라이벌의 남자를 빼앗아 확실한 승리의 마침표를 찍은 지네트. 기분 나빠. 정말 기분 나빠. 아녜스, 지네트. 난 뭐지? 잘난 애들 틈에서 난 뭐지?"
"지네트는 동료고 또 멘토야. 상대가 지네트가 아니라, 남자더라도 혹은 할머니더라도 마찬가지야. 네가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냐고? 그걸 몰라? 공부하기 싫어하는 내가 뭣 때문에 날마다 이 독서실에 나왔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안 나온 열흘 동안 뭣 때문에 이 추운 바깥에서 혹시 네가 올까 기다렸다고 생각해?"
"알아. 그건 다 알아. 나도 이해하고 싶다고."
나경의 말투가 다소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나는 이물질인걸? 너희들은 너희만 아는 이상한 세계에서 정신을 나누고, 나는 완전히 구경꾼인걸? 시간이 갈수록 넌 점점 소정이 세계로 들어가겠지. 여러 나라 다니면서 공연하고, 음반 내고. 원래 넌 그 세계 사람이잖아? 난 도저히 다가설 수도 없는 세계. 넌 평범한 인간들 세계에 잠시 나들이를 왔던 거고. 그 잠깐 사이에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고. 재미 삼아 인간 여인을 농락하고 하늘로 돌아가는 무책임한 옛날 신들처럼."
"나경아."
정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 때문에 질투를 느낀다면, 너는 모차르트도 질투해야 하고 라파엘로도 질투해야 해. 이 세계, 저 세계 하는 말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물론 난 무대를 원해.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 세계 여인만 골라서 사랑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모차르트가 음악가가 아닌 콘스탄체 베버를 아내로 맞은 건 어떻게 이해할래?"
"알로이지아 베버한테 실연당해 꿩 대신 닭이라고 이해할래."
"그렇게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지 마."
"이상하지 않아. 난 벤치야. 아녜스라는 꿩에서 지네트라는 공작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거쳐 가는."
"그딴 생각 관두고, 날 봐. 내 눈을 봐. 뭐가 보여?"
"내가 보여. 네 눈동자 속에서 내가 울고 있어."
"왜?"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그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아서."
"누가?"
"정우야."
나경이 정우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나, 사실은 여태까지 너한테 꼭 하고 싶었지만 정말 하기 힘들었던 말이 있었어."
"잠깐." 정우가 말을 가로막았다. "그 말은 내가 먼저 할 거야."
"거 봐. 또 기회를 안 주잖아."
"사랑해."
"지금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야."
"내가 싫어? 헤어지고 싶어? 하긴 나라도 내가 싫을 거야."
나경이 가슴을 웅크리며 눈을 꽉 눌러 감았다. 가슴속의 무언가와 격렬한 전투라도 벌이는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너를 좋아해.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절대 헤어지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해야 해. 지금 아니면 영영 못할."
"무슨 말?"
정우가 불안한 모습으로 나경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언제든 때가 되면 날 떠나. 괜찮아. 내가 디누의 외롭고 어렵던 시절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소중한 기쁨으로 간직할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거, 너무 고마워. 그 말, 영원히 간직할게. 난 네가 마음껏 하늘로 날아오르는 걸, 네가 저 까마득한 하늘 꼭대기에서 황금 마차를 타고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부르며 세계를 굽어보는 걸 보며 행복할게. 하지만 난 네가 가는 곳까지 같이 못 가. 거긴 아녜스나, 지네트 같은 애들이 가겠지. 아, 내 동생 유선이도. 하지만 난 아니야. 그렇더라도, 난, 네가 내 곁에 있기보단, 그곳에 가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지옥이든 천상이든 난 너와 함께 갈 거야!"
"위로하지 마! 그냥 둬. 하룻밤 엉엉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아직. 아직 그런 얘기는 하지 마. 너에게도 감춰진 능력이 있을 테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야."
"나는 날 알아. 난 아무것도 아니야. 나, 한때 개꿈도 꿨다. 네가 온 세계에 연주 여행 다닐 때, 천재 디누의 아내로 콘서트홀 귀빈석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 하지만 그 귀빈석의 대가가 평생에 걸친 짝사랑이라면, 난 자신 없어. 그 우아함의 대가가 사랑하는 남자의 영혼은 엉뚱한 여인에게 저당 잡히고, 빈껍데기 몸뚱이만 부둥켜안는 것이라면, 여기서 관둘래. 조금이라도 상처가 작을 때."
그 말을 들은 정우가 절반쯤 넋이 나간 모습으로 맥없이 나경을 바라보다 보기에도 측은할 정도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나경은 마취 없이 흉부외과 수술을 하는 것 같은 쓰라림을 느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전해오는 찢어지는 고통과 싸우느라 비틀거리던 나경이 계단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점점 얕은 곳으로, 기관지로, 올라오다 마침내 날카로운 절규가 되어 나경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가지 마! 정우야, 가지 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헤어지기 싫어."
정우가 다시 돌아서서 바짝 다가오더니 나경의 두 어깨를 두터운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천국과 지옥이 모두 소멸될 때까지 널 사랑할 거야."
그리고 나경을 자신의 품으로 천천히 끌어안았다.
"나중에. 나중에, 정우야. 지금은 아니야."
정우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서 들이밀었다.
"미안! 하긴 길거리에서 좀 민망하네? 그렇다면, 바로 오늘의 메인으로 가야지. 이거 주려고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게 뭐야?"
"너를 위해 썼어. 네가 안 나오던 그 며칠 동안 오직 네 생각만 하면서 썼어. 제목은 '마리아를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정우야. 너 정말…."
나경의 나머지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나경은 지금이 영원히 계속되고 인생이 온통 이 순간으로만 가득 메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