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장편소설 디누2부1권 12화 전조들2

by 권재원

2

나경이 연습을 멈추고 악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한숨이 푹 하고 나왔다. 다리의 힘이 다 빠져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온몸의 에너지가 저 작은 악기에 다 쓸려 들어간 것 같았다. 심지어 앉아있는 것도 피곤하게 느껴져 침대에 드러누웠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연습해도 도무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특히 데따슈로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는 대목은 할 때마다 틀렸다.

그런데 마치 그런 나경을 약이라도 올리는 듯 정우의 협주곡 1악장은 전개부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아르페지오 폭풍을 쏟아냈다. 마치 나경의 약점을 알고 교정할 목적으로 연습곡을 쓴 것 같았다.

대충 뭉개고 넘어가고 싶은 대목마다 악착같이 푼타 다르코(punta d’arco)나 포르타토(portato) 기호가 적혀 있었는데, 마치 정우가 “메롱. 네가 그럴 줄 알았지롱.”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 언니. 그거 처음 듣는 곡이다. 무슨 곡이야?”

방문이 빼꼼히 열리면서 콘트랄토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 유선이 슬금슬금 들어왔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유선은 말이 좋아 동생이지 나경에게 너무 벅차고 힘든 존재였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쳐서 수많은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했고, 수석으로 입학한 예술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예정이며, 예술고등학교에 이미 수석 입학이 확정된 상태였다. 심지어 키마저 6센티미터 정도 더 컸다. 그렇다고 나경이 작은 키도 아니었다.

유선은 나경에게 평생의 짐이었다. 늘 동생에게 비교 당하고, 동생 때문에 평가 절하되어 마치 2등급 인류 같은 대접을 받아오며 16년을 살아왔다. 심지어 나경 스스로 그런 취급을 수긍하고 있다는 것이 더 힘들었다. 어머니는 유선의 학교에는 주로 육성회나 학부모회 일로 찾아갔지만, 나경의 학교에는 학생부 호출을 받아 불려 다녔기 때문에 스스로 고개를 들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나경이 불량한 학생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난폭하거나 불량스러운 쪽과는 거리가 아주 먼 학생이었다. 다만 공부도 음악도 동생보다 훨씬 떨어지는 나경이 그 누구도 가볍게 압도할 수 있는 자신의 장점을 활용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걸 날라리라고 불렀다. 선생들은 머리를 염색한다거나 귀를 뚫는 행위를 금품을 빼앗거나 하급생을 폭행하는 것 같은 행동과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경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성도 하지 않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용모가 뛰어난 아이가 미모를 더욱 가꾸는 것 사이의 차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학교는 어머니를 호출해서 싹수가 노랗다, 앞으로 걱정된다 등등의 말을 했다. 어머니는 나경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다 나경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가 더 중요했다. 학교에 불려 올 때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어머니는 걸핏하면 “정말 망신스러워서…. 속상해 죽겠네! 이젠, 우리 집 딸은 유선이 하나밖에 없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나경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서러움에 북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우는 것 역시 엄청난 체력을 요구했고, 한바탕 울고 나면 몰려오는 피로와 무력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경은 반대로 가볍게 웃어버리는 요령을 터득했다.

이것이 16년 동안 시달리며 터득한 나경의 생존 노하우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버리기.

야단 맞아도 슬퍼도, 서러워도 웃었다. 웃는 낯이라고 침을 안 맞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스마일 공주로 불렸다. 이것이 바로 정우를 첫눈에 반해버리게 만든 나경의 환한 웃음의 역사다.

“아니야. 아무것도.”

나경이 서둘러 악보를 뒤집었다. 동생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유선은 끈질기게 추궁했다.

“그거, 남학생한테 받은 거지?”

“어, 어떻게 알았어?”

유선이 통쾌하게 웃었다.

“히히. 그냥 한번 던져 본 말인데, 언니도 참 순진해! 이렇게 한방에 실토하냐?”

“으이그. 계집애. 잔머리는 잘 굴려요.”

“내가 뭐 잔머리 굴렸나? 언니가 순진한 거지.”

이런 일도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었다. 유선은 나경보다 적어도 세 배 이상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경은 번번이 동생의 말장난에 녹아나곤 했다. 처음 당했을 때는 엄청나게 기분이 나빴지만 이것도 자꾸 당하니까 무덤덤했다. 웃음으로 넘기면 그뿐이니까.

“그래. 이거 남학생이 쓴 거다. 어쩔래? 선물 받은 거다. 넌 이런 거 있냐? 남자 친구 있기나 하니?”

“아니.”

유선이 곁에 와서 앉았다.

“나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없어. 그래서 난 언니가 부러워.”

“어머나! 우리 가족의 자랑거리인 네가 우리 집안 망신 거리인 나를 부러워할 때가 다 있네? 아서라. 엄마 들으면 큰일 날라.”

“그래도 언니는 예쁘잖아? 남자 애들은 다른 거 안 보는 거 같아. 예쁜 게 최고야. 그래서 언닌 남자애들한테 늘 인기 최고잖아?”

“어이구. 욕심도 많아. 공부 잘하고 피아노 잘 치면서 인기까지 끌려고? 아서라. 나 따라다니는 남자애들 해봐야, 순 날라리 양아치들인 걸? 머리 좋은 넌 남자애들 대신 선생님들한테 인기가 많잖아? 너 학생부 구경이나 해봤니? 난 거기가 아예 교실이다, 교실.”

“그래도 이거 쓴 남자는 날라리 아니겠지? 날라리가 작곡한다는 말은 못 들어봤으니까.”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모범생은 분명 아닌데, 날라리도 아니야. 그래도 굳이 따지면 모범생일까?”

“음… 사랑하는 나경에게 드립니다. 권정우. 뭐, 권정우라고?”

“야, 남의 걸 왜 훔쳐보고 그래?”

“미안해. 일부러 훔쳐본 건 아니야. 그런데, 디누야. 디누! 이거 진짜야 언니?”

“응.”

“정말? 와, 언니 대박쳤네? 그런데 지네트가 디누 보러 한국 온 거라고 그러지 않았어? 그래서 둘이 잘 되고 있구나, 아녜스 쌤통이다 이러고 있었는데 뭐야? 어떻게 언니가 먼저 차지했네?”

“차지하다니? 무슨 소리야. 소정이가 연애하자고 온 건 아니잖아? 내가 정우랑 연주할 것도 아니고. 또 내가 정우랑 그런 사이도 아니고.”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그럼, 내가 가질래. 나 줘라.”

“에궁. 정우가 무슨 물건이니? 가진다, 준다, 어휴 삭막해. 넌 제발 좀 세상 보는 눈을 고쳐야 해. 그저 뭐든지 경쟁해서 따낼 대상으로만 본다니깐.”

“굳이 따지자면 내가 몇 년 전에 먼저 찜해 놓았는데 언니가 가로챈 거야.”

“어허, 그러셔?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하긴 안 그래도 정우가 네 안부 묻더라.”

“거봐. 내가 먼저라니까.”

“시작은 네가 먼저지만 진도는 내가 먼저 나갔네요.”

“피이.”

“그런데 넌 정우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 피아노 아니면 사람? 난 정우의 피아노는 관심 없어. 난 정우 하나면 돼. 하지만 너희 같은 종족들은 다르겠지? 넌 정우보단 피아노겠지? 그러고 보니 너희 종족들은 정우를 꼭 디누라고 부르더라.”

“아니야. 지네트는 피아노에 반했던 거지만 난 아니었다고. 국민학교 때는 내가 2등상만 수십 개 받게 만든 오빠라서 정말 얄밉고 샘도 나고 그랬는데, 어느 날 다르게 보이더라고. 너무 멋있고, 또 너무 가깝고. 콩쿠르에서 워낙 자주 만나니까 대기실에서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상이 아니라 그 오빠 보러 콩쿠르 나갔어. 언니, 그거 알아? 디누 연주보다 연주하는 디누가 진짜 예술이라는 거? 언제 디누 연주할 때 귀 막고 한번 봐봐. 정말 끝내줘.”

“아유. 짜증 나. 뭐가 이렇게 복잡해? 모처럼 마음에 드는 남자애를 만났는데, 제일 친한 친구에다가 이제는 하나뿐인 동생까지 라이벌 하자고 하네.”

나경이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을 마구 내저었다.

“언니는 신경 쓰지 마. 난 언니 사랑해. 그러니까 난 좋은 처제, 좋은 이모가 될 수 있어.”

“어머! 얘가 벌써부터 무슨 징그러운 소리를!”

“그럼 디누랑 결혼 안 할 거야?”

“넌 뭐든지 그렇게 교과서적으로 생각하냐? 서로 좋아한다고 꼭 결혼을 전제로 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럼 100% 확신하는 건 아니네?”

“사랑에 100%라는 게 어디 있어?”

“그럼 내가 디누한테 대시해도 되겠네?”

“뭐라고?” 나경의 눈이 둥그렇게 벌어졌다. “그건 안 돼.”

“그럼 언니, 디누랑 결혼할 거야?”

“그래. 결혼한다. 해. 어린 게 생각하는 게 왜 이렇게 징그럽니? 완전 애늙은이야.”

“나 애늙은이 아니야.”

“그럼 뭐야?”

“공주야.”

“그래. 잘났어. 그래 실컷 공주 해라. 이 얼음공주야.”

“얼음공주 아니라 그냥 공주라니깐?”

“하여간 못 말려. 못 말려. 정말.”


이전 14화클래식장편소설 디누2부 1권 14화 전조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