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장편소설 디누2부 1권12회 사랑의 색깔은 블루

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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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문턱에 선 겨울이 최후 항전이라도 하는 듯 매서운 바람으로 사정없이 거리를 난타했다. 봄이 오는 줄 알다 역습을 당한 사람들이 잔뜩 겁을 먹고 집 밖으로 얼씬도 안 하는지 거리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한산했고, 풀빵 장사는 추위와 싸우랴 안 되는 장사 억지로 하랴 정신을 못 차리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정우는 그 추위를 견디며 독서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 멍청히 서 있었다. 나경이 지네트 집에서 뛰쳐나간 뒤 생긴 버릇이다. 나경의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독서실에는 그날 펼쳐 놓은 책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나경이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우는 날마다 행여 오늘은 나경이가 올까 문 앞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이번에도 허탕일 것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결핍감이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겠다. 만난 지 겨우 100일밖에 안 되었다. 사귀자고 한 적도 없고, 서로 고백 같은 것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나경과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그들은 거의 날마다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했고, 주일에는 같이 미사에 참가했다. 겨우 100일이라고 하지만 100일을 그렇게 날마다 함께 했다. 그렇게 날마다 보던 얼굴이 갑자기 안 보이자 정우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렸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때 200미터 전방에서부터 낯익은 실루엣이 소실점의 역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아, 나경인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나경보다 메마르고 키도 작았다. 실루엣이 매우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오더니 지네트의 모습으로 바뀌어 그 앞에 멈추어 섰다.

"어머. 추운데 여기서 나와서 뭐하는 거야?"

"그러는 넌? 아프다는 애가 이 추운 날 밖에는 왜 나왔어?"

"그건 벌써 다 나았지. 그냥. 너희 좀 보고 싶어서. 꼭 할 말도 있고. 나경이는? 안에 있니?"

"안 나온 지 벌써 일주일이야. 내일은 나경이 집에 쳐들어갈 생각이야. 나경이 부모님 계시거나 말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말 할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말? 거봐. 너 나경이 사랑하는 거 맞지."

"그런 말 좀 하지 마. 머리 터질 지경이야. 지금은 나경이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

"꼭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런데, 너 환자를 이렇게 추운 거리에 계속 세워 둘 거니?"

"아 참! 그래. 미안. 일단 아무데나 들어가자."

정우는 화려한 간판을 달고 있는 새로 생긴 경양식집으로 지네트를 안내했다.

외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웨이터가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정우는 커틀렛을, 지네트는 야채수프를 각각 주문했다.

"꼭 할 말이 있다고?"

정우가 컵의 물을 천천히 들이키며 물었다.

"응. 오해는 마. 비즈니스 토크니까. 확답을 받아야지."

"이미 짐작하고 있어. 올 여름 시즌에 같이 투어 한다 이 얘기 하려는 거지? 맞지? 공연은 모두 몇 회나 하고?"

"10회."

"한 달 안에 열 번이라. 일정 빡세네."

"조건이 몇 개 있어."

"어차피 네가 주인이니까. 어디 대봐."

"첫째, 곡목은 전적으로 나한테 일임한다."

"당연한 거 아닌가? 어차피 네가 갑이잖아."

"둘째, 이중주만 하지 않고 각자의 독주 시간도 넣는다."

"그것도 오케이."

"그런데 너 개런티 같은 거 안 물어봐?"

"주는 대로 받을게. 지금 내가 개런티 타령하게 생겼어? 무대를 다시 찾느냐 마느냐 하는 판에?"

"쿨하네. 좋아. 그럼 투어 얘긴 끝났고, 그 다음 얘기."

"또 있어?"

"나랑 국민학교 때 알던 음악 친구들끼리 만나는 모임이 있어. 여러 악기 하는 애들이 두루두루 있고, 나름대로 다들 한 가닥씩은 한다고 믿는 애들이야. 그냥 모여서 할 일 없이 시간이나 까먹지 말고 뭔가 음악 활동을 하자고 뜻이 모여 실내관현악단을 하나 만들기로 했어. 그리고 내가 퍼스트 바이올린 수석을 맡기로 했고."

"뭐? 천하의 지네트가 애들 오케스트라 단원 노릇 하겠다고?"

"협주곡 연주할 때 도움되거든. 오케스트라의 귀를 경험하는 게."

"그래. 그건 말이 된다."

"문제는 이름인데, 서울 청소년 실내관현악단이라는 지루한 이름이 제일 많이 나오더라고. 난 청소년이란 꼬리표가 싫다고 했지. 기성 연주자들보다 한 수 접는다는 느낌이 들잖아? 그래서 내가 팍팍 우겨서 '서울 영 프로무지카'라고 이름을 지었어. 이 이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솔직하게 말해도 화 내지 않을 거지?"

"그럼."

"국적불명의 완전히 뒤죽박죽 이름이야. Young은 영어, musica는 이탈리아어. 그런데 pro가 애매한데, for에 해당되는 이탈리아어야, 아니면 프로페셔널이란 뜻이야? 또 오케스트라는 여러 명이 하는 거니까, musica가 아니라 musici라고 써야 맞잖아? Seoul Young Pro musicians 아니면, Pro musici giovanili Seoul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네 말이 옳아. 하지만 난 의미가 통하는 범위 내에서 글자 수를 최소화하고 싶었어. 문제는 이름이 아니라 다른 거야."

"일테면?"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면 책임이 따른다는 것. 즉 프로 뮤지션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음악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래서 디누가 필요해. 같이 하자."

"내가? 내가 왜? 내가 알기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 악기가 아닌데? 물론 내가 바이올린을 좀 하긴 하지만 프로라고 하긴 그렇고."

"지휘자! 지휘자가 필요해."

"지휘자? 내가? 난 지휘 전공이 아닌 걸?"

"너 내가 아녜스 친구라는 거 자꾸 잊어먹는데, 나 아녜스한테 너에 대해 알아야 할 거 다 전해 듣고 왔어. 네가 지히발 선생님한테 지휘랑 작곡 배웠다는 것도 훤히 알고 있어. 저번에 모차르트 협주곡 관현악 파트 피아노로 편곡한 거 들어보고 확실히 오케스트라 공부 많이 했구나 하고 생각했고. 내 말이 틀려?"

"그렇긴 해. 지히발 선생님한테 교재랑 강의록 받아 연습했어. 비디오도 보고. 하지만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한 적은 없어. 게다가 난 요즘 바빠."

"바빠? 뭐 하느라?"

"쇼팽 콩쿠르가 얼마 안 남았어."

"바로 그게 세 번째 조건이야. 쇼팽 콩쿠르 포기하는 거."

"야, 무슨 소리야? 나름 재능 있다고 자부하는 젊은 피아니스트한테 쇼팽 콩쿠르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지금 제정신이야?"

"알아. 쇼팽 콩쿠르가 청년 피아니스트들이 모두 꿈꾸는 기회라는 거. 그런데 너한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넌 이미 세 번이나 국제대회에서 수상했잖아?"

"그걸로 벌어 놓은 점수는, 작년 그 끔찍한 공연으로 다 까먹었어. 슈퍼스타 아녜스가 활을 꺾을 정도였는데, 디누의 알량한 밑천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처음부터 점수를 다시 따야 해. 쇼팽 콩쿠르 우승하면 그동안 까먹은 것 다 보충하고도 남겠지. 우승 아니라 파이널 파이브만 올라가도 내 나이가 사상 최연소니까 충분히 화제거리가 될 것이고. 넌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연습하고 공부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 상이 목적이야, 상을 발판으로 세계 무대에 다시 서는 게 목적이야?"

"무대지. 나 절박해. 무대를 되찾느냐, 그냥 음대 입시생이 되느냐 갈림길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무대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는 명예나 상금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지?"

"맞아. 뭐하냐 지금? 플라톤 대화편 쓰냐?"

"그렇다면."

지네트가 한 음절 한 음절 끊어 가며 단호하고 냉랭하게 말했다.

"쇼팽 포기해."

"뭐? 왜?"

"네 무대는 내가 되찾아 줄게. 넌 너의 능력만 보여주면 돼. 인정하지? 내가 그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는 것."

정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비록 나이는 그와 같은 17세지만 벌써 은퇴하거나 사망한 연주자까지 포함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20명 중 한 사람으로 당당히 이름이 올라간 거물 지네트였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그 정도 위상을 차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역사상 메뉴힌과 하이페츠뿐이었다.

"지휘자가 되어줘. 네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나에게 보여줘. 날 감동시켜. 그 쪽이 쇼팽보다 숏컷이야."

정우는 지네트의 오만한 말투 속에서 단호한 선언을 읽었다.

'난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어. 그런 내가 디누 너를 키워주겠어. 단, 먼저 내가 던져 줄 시험을 통과해야 해.'

사랑을 간청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없었다.

정우는 자신이 압도당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거부할 길이 없었다. 저 구름 위에서 그 신성한 목소리가 계시라도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스컴에서 요란하게 떠들어대며 심지어는 거의 신화화시키기까지 했던 지네트의 진짜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정우가 또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는 질투심을 억지로 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겠어. 단 나도 조건이 있어."

"얼마든지."

"우선, 그 오케스트라는 반드시 공연을 해야 해. 관객 없이 연주하는 건 질렸거든."

"당연하지. 오케스트라를 왜 만들었는데?"

"두 번째 조건. 그 공연 연주 곡목은 내가 고를 거야."

"좋아. 지휘자라면 그 정도 권한은 가져야지."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건 좀 어려운 조건일 수도 있어."

"말해봐. 널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나더러 무대 위에서 캉캉을 추라고 해도 할 거야."

"하하하! 무슨 그런 심한 말을? 그렇게 곤란한 건 아니야."

"그럼?"

"적어도 한 번은 나경이가 솔로 바이올린을 맡아 협주곡 공연을 한다. 이게 마지막 조건이야."

"나경이를? 협주곡의 솔로로?"

지네트의 오른쪽 눈이 한 배 반 정도 커졌다. 왼쪽 눈은 무표정하게 그대로 두면서 오른쪽 눈만 날카롭게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스틸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30초가량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지네트가 다시 두 눈의 크기를 똑같이 만들고 말했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솔직히 나경이가 잘 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니까. 더구나 네가 나경이를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 믿어. 나경이라면 선생님 레슨은 땡땡이 쳐도 네 레슨은 열심히 할 거잖아? 어쨌거나 난 너를 전적으로 신뢰해. 그럼 얘기 다 끝났지?"

"끝났어."

"고마워. 그럼, 이제 선언할게. 1985년 2월, 서울 영 프로무지카의 협회장이며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겸 악장 지네트는 디누를 정식으로 본 단체의 예술감독 겸 지휘자로 위촉합니다."

"귀 단체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뭘 해야 해?"

"첫째,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악장인 나와 만나서 악단의 음악적 방향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있는 협의를 할 것. 장소는, 뭐, 여기로 하자. 분위기도 좋은데. 어때?"

"문제없어. 단, 밥값은 돈 많은 네가 내. 여기 꽤 비싸네."

"물론이지. 그런데 그 말을 꼭 지금 꺼내야겠니? 정말 무드 깨는 데 도사라니까. 참. 이건 네가 없을 때 정해 놓은 건데, 이번 금요일 7시 하림각에서 전체 모임이 있어. 좀 멀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넌 꼭 와야 해."

"그 친구들 학교에서 가까운 데 잡았네. 좋아. 내가 그리 가지."

지네트가 크리스탈과 대리석을 섞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투명한 손을 내밀었다.

"좋아. 얘기 끝났어. 이제 우리는 음악 동지야. 나 앞으로 사랑타령 안 할 테니까, 너도 무슨 재능을 질투하니 등등 이상한 타령 안 하는 거다. 알겠지? 약속!"

"Certe!"

정우가 지네트의 손을 굳세게 잡으며 어색한 프랑스어를 말했다.

그러자 지네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누이며 마치 태풍 속에서 간신히 구조된 조난자 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마음이 놓여. 네가 이렇게 다시 건방지고 오만한 모습으로 돌아온 걸 보니까 기분이 정말 좋아. 역시 넌 그게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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