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2부 11화 사랑의 색깔은 블루1

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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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헤드폰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아주었다. 더구나 들리는 음악은 헨델의 수상음악. 정우의 예민한 귀에 따스한 산들바람이 불었다. 거기에 맞추어 정우는 살랑살랑 경쾌한 부레 스텝으로 거리를 스쳐 지나갔다. 부레 스텝이 가보트 스텝으로 바뀌면서 독서실에 도착했다.

버클리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니 나경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표정도 어두웠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나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끄떡없어. 근데, 소정이가 아파."

"지네트가?"

"응."

이런. 간신히 잠재워 두었던 그 이름이 또 튀어나오다니. 정우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뜨끔거렸다.

아프다고? 하긴 지네트는 겉보기에도 별로 건강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정우는 그 날 있었던 일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병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가슴이 무거웠다.

나경이 정우의 찜찜한 가슴에 콕콕 찔리는 말을 계속했다.

"어제 유선이랑 같이 지네트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 지나도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전화했거든. 장소 예약하고 시간 날짜 잡은 것도 지네트인데, 정작 본인이 안 나오니까 너무 걱정되잖아. 일주일째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계속 누워만 있었다는 거야."

"저런. 정말 많이 아픈가 보네."

증폭되는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정우가 면피성 발언을 했다.

"문병 갈래."

나경이 가방을 쌌다.

"그래. 얼른 갔다 와. 오늘은 나 혼자 공부하지 뭐."

"무슨 소리야? 너도 가야지. 같이 가려고 기다렸단 말이야."

제풀에 놀란 정우가 난처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니, 아무래도 나는 글쎄, 그게."

"왜? 같이 가자."

"난 만난 적도 얼마 안 되는 데, 불쑥 집에 간다는 게 좀 그러네."

"어머, 천하의 디누가 부끄럼을 타? 지금 날도 어두워지려고 하는데? 넌 내 보디가드로 따라가야 해. 고급주택가에서 부녀자만 납치해 몸값 뜯어내는 범죄단이 있다더라. 나같이 부티도 나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빵빵한 애는 얼마나 위험하겠어?"

"너 100미터 14초잖아? 뛰는 거 보니까 맘먹고 도망치면 웬만한 남자들 다 따돌리겠더라. 아니면 맞짱을 떠도 웬만한 남자한테 이길 것 같은데?"

"너 정말 자꾸 그럴 거야? 너 친구 맞아?"

나경이 자꾸 재촉했다.

정우는 뜨끔뜨끔하는 가슴을 누르고 할 수 없이 내려놓던 가방을 다시 들고 나경을 따라 나서야 했다. 이미 한번 가본 길이지만 처음 가보는 척하며 나경의 뒤만 종종 따라가려다 보니 빠른 발이 몹시 답답했다.

지네트 집에 들어서자 이미 여러 번 와 봤는지 나경이 익숙한 발걸음으로 침실을 향해 달렸다. 지네트가 정맥의 푸른빛이 드러날 정도로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소정아!"

나경이 울먹이며 지네트의 손을 잡았다.

"어떡해? 손도 너무 차."

"괜찮아. 찬바람 맞아서 감기 걸린 것뿐이야. 며칠 쉬면 나을 거야. 어머, 디누도 왔네?"

"응. 내가 끌고 왔어. 나 보디가드 하라고."

"괜찮아?"

정우가 어색한 인사를 던졌다. 지네트도 말없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참. 밥은 먹었어? 이런 병 걸렸을 땐 약보다도 잘 먹는 게 훨씬 중요한 건데."

나경이 마치 병구완하는 엄마처럼 말했다.

"어제까지는 잘 먹었는데, 오늘은 별로…."

"어머, 이런 바보같이."

나경이 벌떡 일어섰다.

"정우야. 넌 여기서 소정이 좀 봐줘. 난 부엌에 가서 뭐 좀 해올게."

"라면밖에 못 끓인다면서?"

"바보야, 그 말을 믿었어? 그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머리로 생각해봐라. 내가 공부는 못해도 엄마 아빠가 다 밖에서 바쁘게 활동하는 집의 큰딸이야. 설마 할 줄 아는 게 라면밖에 없을까?"

나경이 정우를 향해 손가락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아, 그런가?"

머쓱한 정우를 무시하고 나경이 눈길을 지네트에게로 돌렸다.

"20분만 기다려. 내가 뭐라도 좀 해올게."

나경이 휭 하는 소리를 남기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둘만 남게 된 정우와 지네트가 눈길을 서로 피하며 어색한 침묵을 이어갔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지네트였다.

"다신 안 볼 것처럼 나가더니. 이렇게 또 만나네? 이번에는 공부방이 아니라 침실이야."

"나경이가 하도 보채서."

"그뿐이야?"

"올 때는 그뿐이었는데, 와서는 생각이 바뀌었어. 사실 사과하고 싶었어."

"아니야. 내가 먼저 잘못했는 걸. 그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디누를 미워하지는 않아."

"용서해줘서 고마워."

정우가 가볍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뭐야, 그 어색한 인사는?"

"바이올린의 여신 지네트에게 바치는 인사야."

"그럼 그 인사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지네트도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답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뭔 청승이래? 방에서 무대식 인사라니."

"그러게? 그런데 누워서 하는 인사가 어디 있어? 기왕이면 정식으로 하자. 손 좀. 나 일으켜줘."

"자, 여기."

정우가 손을 내밀자 지네트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정우는 그 손이 생각보다 훨씬 차가워 섬찟 놀랐다.

지네트가 침대에 걸터앉아 두 발을 끌어당겨 무릎을 손으로 끌어안은 자세로 앉았다.

"왜 그렇게 뿌리쳤어? 그냥 매너 좋게 돌려 말할 수도 있었잖아? 나, 아녜스랑도 친구고 나경이랑도 친구야. 다 이해했을 거라고."

지네트가 정우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정우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지네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부끄럽네. 사실, 그러니까, 난, 너하고 갑자기 가까워지는 게 무서웠어.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무서워."

"무서워? 내가? 왜?"

"너랑 재미있게 연주했을 때 나, 속으로는 절망했어. 네 연주를 듣고 화가 났어. 너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졌어. 이런 재능이 있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어. 그래서 네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맞아. 정말 비열한 생각이야."

"그런 이상한 말 하지도 마. 디누. 난 단지 연주를 잘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넌 같은 곡을 연주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소리로 바꾸어 놔. 모차르트든, 쇼팽이든, 바흐든 일단 네 손가락을 한 번 거치면 모두 디누의 음악이 돼. 난 오히려 너의 그런 능력이 부러워. 그런 빛나는 창조성이야말로 타고나는 것이지, 훈련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잖아?"

"타고나? 타고났다고? 하하하!"

정우가 별안간 허탈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왜?"

"너도 그렇게 쉽게 말하는구나. 자, 잘 들어. 나의 실체를 폭로할 테니까. 난 날마다 몇 시간씩 손가락 체조, 손목 체조, 그리고 지루한 반복 훈련을 해. 날마다 손가락 사이사이 골프 공 하나씩 끼워 놓고 찢어지는 아픔을 견디기도 했어. 난 초보자처럼 날마다 하농 연습곡을 다섯 번 반복해서 쳐. 동네 사람들 시끄럽다고 난리 쳐서 밤늦게 약음기 끼워 놓고 말이야. 너처럼 정말로 타고난 아이는 이런 고통, 상상도 못 할 거야. 넌 이렇게 피나도록 연습한 적 있어?"

지네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연습하지 않아."

"하지만 난 다섯 시간씩 연습을, 아니 훈련을 해. 알겠니? 그게 너하고 나의 차이야. 난 절대 타고난 천재가 아니야. 아니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네 앞에서는 아니야. 네가 잘못 봤어."

"그렇지 않아. 건반 위에서 당당하게 너만의 세계를 뽐내던 널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그 디누 어디 갔어? 레슨도 받은 적 없는 수많은 난곡들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거기에 독특한 해석을 덧붙일 수 있던 취리히의 디누는 어디 갔어? 죽었니? 죽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건 누구야?"

"정우는 여기 있는데 디누는 모르겠어. 디누는 어느 겨울날 죽었어. 너 기억나? 바로 여기서 같이 연주하고 나서 레퀴엠 틀었던 거? 그게 그 잘난 디누를 위한 진혼곡이야. 그때 죽었어."

"그래? 그랬어? 아니, 그냥 죽었다기보단 자살했겠지."

지네트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을 것 같은 힘이 담겨 있었다. 병석에 누워 있는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 지네트가 계속 그 소리로 말했다.

"그래. 얼마든지 죽여. 네가 아무리 디누를 죽이고 또 죽여도 난 계속 되살려 낼 테니까. 네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디누를 살려 내서 피아노 앞에 앉힐 테니까. 서울뿐 아니라 빈에서, 파리에서, 잘츠부르크에서, 뮌헨에서, 뉴욕에서."

"나도 원해. 나도 그런 곳들에서 연주하길 원해. 하지만 너하고 연주하고 싶진 않아."

"뭐? 왜?"

"말했잖아? 무서워."

"이디오!"

마음이 격해진 듯 지네트 입에서 프랑스어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가늘고 살점 없는 손이 허공을 가르더니 예리한 파열음과 함께 정우의 뺨에 적중했다.

정우는 '꼬마 니꼴라'라는 프랑스 소설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수시로 뺨을 철썩철썩 때리는 장면이 나오던. 아, 이게 프랑스 문화인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나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한 대 패니까 시원해?"

"자신을 깨달아."

"넌 '분수를 알아라'라는 말을 영 엉뚱하게 사용한다? 그래, 난 오래전부터 내 분수를 잘 알고 있었어."

그러자 마침내 지네트가 정우 가슴팍의 옷자락을 구겨 잡으며 울먹였다.

"널 만나는 게 꿈이었어. 미우는 내가 존경했고, 무엇보다 너흰 남매니까. 아녜스는 나랑 같이 바이올린 공부한 친구니까. 계속 양보하며 지난 몇 년 동안 꿈꿔왔어. 그리고 마침내 나한테 기회가 왔어. 그런데 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 상태로 잠시 시간이 멈추었다. 이번에는 정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

"쎄르뗑멍!"

"만약 내가 가진 밑천이 정말 이게 전부라면? 그동안 네가 나를 엄청나게 과대평가해 왔던 것이라는 게 드러난다면? 그때 그 형편없었던 공연이 진짜 내 모습이라면?"

"그럴 일 없어. 그건 이미 직접 확인했으니까. 연주 몇 번 같이 했잖아? 네가 정말 그 정도였으면 그 카페에서 몇 번 연주하고 넌 두 번 다시 날 보지 못했을 거야. 난 이미 판단을 마쳤고, 너를 도와주기로 결심했어. 내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건 너도 인정하지?"

"인정해."

정우의 고개가 끄덕끄덕했다.

"자아, 이제."

지네트가 정우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이 순간이 역사적인 순간이 되기를.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을 디누와 지네트가 처음으로 듀오를 결성한 아름다운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하기를!"

"휴우. 운명의 장난이야. 원컨대 나의 세 번째 파트너와는 끝까지 갈 수 있기를."

"아니."

뜻밖에도 지네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니?"

"난 너하고 이중주를 계속할 생각 없어."

"무슨 말이야?"

"너를 내가 있는 곳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이중주를 제안했을 뿐이야. 그 다음부터는 네 스스로 날아올라가길 원해."

"난 네가 있는 곳까지만 가도 현기증 날 것 같은데?"

"천만에. 넌 순식간에 나를 발판처럼 딛고 멀리 날아가 버릴 거야. 그때 나 버리거나 무시하지나 말아줘."

"그런 걱정하지 마."

그때 나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지금 뭐해? 무슨 연극 연습이라도 하는 것 같아. 손은 왜 붙들고, 또 표정들은 왜 그래?"

"그러니까."

지네트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지금 우리 팀 만들기로 했거든. 나 다 나으면 당장 올 여름부터 투어 시작할 생각이야."

"그래? 와, 진짜 축하해. 너흰 환상의 듀오가 될 거야. 아차."

나경이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다 손에 들고 있던 죽 그릇을 떨어뜨렸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엎어진 죽이 꿈틀대면서 모락거리는 김과 함께 흘러내렸다.

나경이 엎어진 죽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훽 돌려 정우와 지네트를 각각 한 번씩 돌아보았다.

"왜 그래, 나경아?"

지네트가 걱정스럽게 물어보았지만, 나경은 아무런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맹렬한 속도로 뛰쳐나갔다.

"가서 잡아. 나경이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몰라."

지네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정우는 망연자실해 있다가 불현듯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나경이 사라진 흔적을 따라 달렸다. 그러나 정우와 주력이 별로 차이 나지 않는 나경이 이미 벌려 놓은 거리는 따라잡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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