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2부 1권 9화 레퀴엠 1
레퀴엠
1
정우는 골목길을 헤매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고급주택이 많이 몰려 있기로 유명한 구역이다. 3미터가 넘어 보이는 높은 담장과 그 담장을 덮은 날카로운 창살들 사이로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높은 담장 안에 대체 어떤 집이 있고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언뜻언뜻 창살 사이로 가지를 교묘하게 다듬어 모양을 만들어 놓은 향나무, 전나무, 어디 폐사지에서 주어온 듯한 조각, 석탑 같은 것들의 모습이 보였다.
비록 헤매고 다닐지언정 정우의 걸음걸이는 씩씩했다. 의사가 장담했던 2주보다 훨씬 빨리 회복되어 언제 다쳤냐 싶을 정도로 멀쩡했다. 타고나길 강한 몸을 타고 난 데다, 각종 스포츠와 무술로 단련된 덕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고급 주택가를 헤매던 정우의 발걸음이 거대한 담장 앞에서 멈추었다. 지금까지 봤던 저택들이 죄다 다이오라마로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담장이었다.
어지간한 저택 앞에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정우가 이 담장 앞에서는 손에 들고 있는 쪽지에 적힌 주소와 담벼락에 붙은 숫자를 몇 번씩이나 맞춰 보았다. 아무리 맞춰 봐도 두 숫자가 일치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잘 찾아왔네?”
지네트다.
“여기가 정말 지네트 집?”
“음, 내 집은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아빠 집. 내 집은 파리에 있어.”
“아빠 집, 내 집 이렇게 구별하는 게 영 어색한 거 보니 확실히 난 한국 사람인가 봐.”
“음. 뭐, 그건 복잡한 내 가정사 때문이고, 참, 디누, 다친 건 다 나았어?”
“멀쩡해. 한 달이나 지났잖아.”
“그래? 그럼 배고픈데 점심부터 먹자. 그리고 같이 연주 해야지?”
지네트가 정우 팔꿈치에 손을 끼웠다. 정우는 여전히 얼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 어마어마한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대문을 들어서자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겨울이라 누르게 변한 잔디로 덮여 있는 정원은 온통 황금 들판을 이루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동서양 양식이 마구 뒤섞인 조각들이, 조각들 가운데는 분수대가 자리잡았다.
정원 귀퉁이에는 풀장과 테니스 코트, 그리고 골프 연습용이라고 생각되는 그물망과 과녁이 보였다. 하지만 엄청나게 크고 으리으리하다는 느낌 뿐, 아름답고 근사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뭘 그렇게 이상하게 봐?”
“정원이 너무 커서.”
“좀 과하지?”
“그러게. 동네 한 바퀴 돌 것도 없이 집안 한 바퀴만 돌아도 다이어트는 완전 해결이네.”
“그렇게 대단하게 볼 거 없어. 그냥 아빠 취향이라서. 난 이 집도 이 마당도 싫어. 디누 아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어서 들어가.”
지네트가 단호한 모습으로 앞장서자 정우는 하는 수 없이 엉거주춤 그 뒤를 따라갔다. 확실히 프랑스 아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은 몹시 민감하구나 싶었다.
현관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갖가지 기이한 그림들과 화초들로 장식된 넓은 거실이 정우를 맞이했다. 바닥에는 붉은 벨기에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천장에는 요란한 광채를 내는 크리스탈 상들리에가 흔들거리며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역시 요란하기는 하지만 우아하다거나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리 와. 내 방에 가.”
아니나 다를까 지네트가 거실 역시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빠르게 통과하더니 2층에 있는 어느 방문 앞에서 손짓으로 독촉했다.
정우가 당황하며 발을 멈췄다.
“네 방에 가자고? 그건 좀”
“공부방에 가자는 거지 침실 가자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걱정은 무슨.”
정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네트가 문을 열어주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말이 좋아 공부방이지 거의 교실이나 다름없는 넓은 방이 열렸다. 그 넓은 방 한 가운데를 육중한 그랜드 피아노가 차지하고 있었고, 벽에는 거대한 오디오 시스템과 텔레비전, 비디오, 레코드 판, 레이져 디스크 등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간다는 원리에 따라 정우는 자석처럼 피아노에게 이끌렸다. 가까워질수록 피아노의 자태가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여 부둥켜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천천히 뚜껑을 열어 올리자 그 뒷면에 감추어져 있던 루벤스 풍의 그림이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물건이라면 소녀의 공부방이 아니라 유럽 어느 나라 역사박물관에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피아노였다.
정우의 눈이 번쩍 뜨이고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뵈젠도르퍼! 그것도 92건반? 세상에. 난 이게 유니콘 같은 건줄 알았지 실제 있는 물건인 줄 몰랐네. 아니,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렇게 좋은 피아노를 뭐에 쓰려고?”
“아, 그거 8년 전에 쓰던 거야. 나 피아노 하다가 갈아탄 거 알지?”
“그러니까, 8년 전이라면 국민학생이 뵈젠도르퍼를 쳤다고?”
“원래 아빠는 엄마까지 데리고 한국 들어올 생각이었고, 결혼 선물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피아노를 주고 싶었으니까. 아빠가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은 돈 뿐이니까. 하지만 엄마가 하늘나라로 먼저 가고 국민학생인 내가 엄마 대신 이걸 쳤어.”
“아아. 그렇구나. 미안해. 옛날 이야기 들추게 만들었네.”
“아니, 괜찮아. 그 보다, 난 얼른 디누 연주 듣고 싶어 미치겠어. 뵈젠도르퍼를 연주하는 디누라니.”
“나도 궁금하다.”
정우는 얼굴 가득 기대감을 품고 건반 몇 개를 눌러 보았다. 누를 때마다 울려 나오는 소리는 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두드려 본 피아노를 다 합쳐도 당하지 못할 정도로 훌륭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정우는 마음 속에서 작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부조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가정용 피아노가 공연장에 있는 피아노 보다 훌륭하다는 것이 부조리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부조리이겠는가?
마치 돈이 예술을 지배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을 확인한 것 같았다. 이 현실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굴욕감도 느껴졌다. 이런 얼룩진 생각들이 정우에게 깊은 슬픔이 되어 가슴을 헤집었다.
그러나 건반들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그를 유혹했다. 정우는 그 유혹을 이기기에는 피아노를 너무 사랑했다. 마침내 뵈젠도르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레파토리인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 만에 두드려 보는 연주회용 피아노인가? 벤츠 차 두 대 값에 버금가는 피아노는 과연 비엔나 출신다운 맑고 풍부한 울림을 자랑하며 마치 정우와 오래 사귄 친구처럼 즐겁게 노래했다. 4악장 끝 무렵에 이르자 정우의 눈이 절반 정도 감기고, 입술의 양 끝이 조용히 위로 치켜 올라갔다.
마침내 연주를 마무리하자 바이올린을 비스듬히 들고 다가오는 지네트의 모습이 보였다. 편안한 일상복 차림에 단지 바이올린 하나 추가 되었을 뿐인데 아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지네트는 객관적으로 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체구도 작고 얼굴에는 작은 매력 포인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바이올린을 들자 바로 보티첼리의 그림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반짝이는 모습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 모습에 넋을 잃어버리다시피 한 정우의 귓가에 지네트의 속삭임이 들렸다.
“같이 해.”
“어?”
“듀엣 하자고. 디누! 청중도 없고, 극장도 아니지만. 바로 이 자리에서 지네트와 디누의 첫 번째 공연을 시작하자고.”
“좋아. 어떤 곡 할까?”
“디누가 좋아하는 곡으로.”
“모차르트 G장조 콘체르토 해 볼까?”
정우는 왜 갑자기 이게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역할을 바꾸어 이 곡을 연주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네트의 대답은 시무룩했다.
“그런 편곡본 말고 오리지널 2중주를 하고 싶어.”
“걱정하지마. 이건 사실상 오리지널2중주니까.”
“어떻게?”
지네트가 반문했지만 정우는 대답 대신 바로 인트로를 연주했다.
“정말이네. 이런 편곡은 첨 들어봐.”
“그렇지? 이건 내가 편곡이 아니라 작곡 한 거니까. 기존 편곡본 피아노 파트는 오케스트라처럼 들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아 흥미가 없었어. 그래서 진정한 2중주가 될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썼어. 원곡 오케스트라 파트는 주선율 외에는 아예 참고 하지도 않았어. 콘체르토의 피아노 편곡본이 아니라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2중주 소나타로 완전히 다시 쓴 거야. 이거야 말로 진짜 오리지널 아니겠어?”
지네트는 대답 대신 빙긋이 웃으며 인트로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어깨 받침을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습관대로 바이올린을 어깨에 바로 얹고 연주를 시작했다.
“아!”
단 몇 음 만에 정우는 연주를 중단하고 벌떡 일어설 뻔했다.
지네트의 연주는 처음 한 소절부터 달랐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바이올리니스트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날 카페 러브리에서 연주했던 것과는 차원이 아예 달랐다. 그날은 그냥 놀이였던 것이다.
유려하고 섬세한 보잉, 극히 정확하고 깔끔한 핑거링, 악상 기호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들로 한 음 한 음 채워 나가는 치밀함. 그리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품이 넘치는 우아한 감각과 돌부처라도 울릴 것 같은 호소력.
아녜스는 아예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았고, 정우의 영원한 우상인 누나, 심지어 누나의 스승인 헨릭 셰링조차 이 가냘픈 소녀가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 분명했다.
정우 귀에는 마치 아루튀르 그뤼미오의 우아함, 헨릭 셰링의 호소력, 지노 프란체스카티의 테크닉이 지네트라는 깡마른 소녀의 연주 속에서 하나가 된 것 처럼 들렸다. 그러면서도 그 대가들 누구에게도 환원되지 않는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내고 있었었다. 이게 말이나 되나?
단 한 번도 남을 칭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정우에게는 이런 경험을 담아낼 감정의 도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험이 내면을 뒤흔들었다. 이 상태를 수습하려면 일단 아무 감정에라도 환원시켜야 했다. 순간 정우의 내면에서 질투라는 감정이 뭉클 뭉클 일어났다.
물론 이전부터 정우는 지네트를 질투해 왔었다. 하지만 그 질투는 자신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영예를 대신 누리고 있는 것 같은 운 좋은 부잣집 공주님에 대한 삐딱한 정서, 차라리 시샘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 정우는 자신이 시샘할 자격조차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음을 보라색으로 멍들이는 질투의 안개를 흩어버리기 위해 정우는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혹은 지네트가 피아노에서 바이올린으로 전향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참하고도 한심했다.
정우의 세계가 무너졌다. 내년도 쇼팽 콩쿠르를 마치 예약이라도 해 놓은 듯 자신만만해 하던, 적어도 음악에 관한한 자신을 넘어설 사람은 현재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함을 기둥으로 삼아 유지되어 왔던 정우의 세계가 산산조각 났다. 세계가 무너진 이상 더 이상 연주를 계속할 수 없었다. 연주고 뭐고 간에 우선은 살아야 했다.
-쿵!
정우는 연주를 멈추고 건반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울렸다.
지네트가 깜짝 놀라며 연주를 멈추었다.
“왜 그래? 연주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야. 너무 훌륭해! 너무 훌륭해서 화가 날 지경이야! 이런 낭창낭창한 거 말고, 크로이처 소나타 어때?”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 하자고 한 정우의 속내는 뻔했다. 누나와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닐 때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렸던 곡, 그리고 아녜스와의 망쳐버린 공연에서 연주했던 곡이기 때문이다. 정우는 누나와 아녜스와 지네트를 한 자리에서 대결시킬 생각이었다.
지네트가 흔쾌히 응했다.
“좋아. 좋아하는 곡이야. 악보도 필요 없어.”
“미투. 먼저 시작해.”
“세봉.”
지네트가 다시 바이올린을 들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정서로 가득 찬 더블 스토핑의 서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슬픔으로도 분노로도 들렸으며 체념으로, 혹은 사랑으로도 들렸다.
이윽고 정우가 그것을 피아노로 받았다. 지네트의 연주에서는 약하게 느껴지던 감정의 파도가 정우가 끼어들자 거대하게 너울이 되었다. 뵈젠도르퍼는 아주 섬세한 터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배음마저 풍성하게 울렸다.
이윽고 빠르고 격정적인 제 1주제가 제시되자, 그들은 그 격렬한 모티브를 마치 뜨거운 프렌치 키스 하듯이 주고받았다. 정우는 거의 오르가슴을 느낄 정도의 황홀경을 느꼈다.
이 느낌. 너무도 그리웠던 이 느낌! 누나와 연주활동을 했을 때의 느낌. 누나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그리고 누나가 아예 연주를 접어버리면서 영영 느끼지 못할 것 같았던 그 느낌. 아녜스의 재능으로도 결코 되살리지 못했던 그 느낌이 지네트와 연주하자 오히려 몇 곱절 업그레이드되어 가슴을 두드렸다.
바이올린이 밀고 들어오면 피아노는 그것을 품어 안고 뒤 흔들었다. 그러면 바이올린은 어느 결엔가 저 하늘 꼭대기까지 비상하여 가냘프고 애절한 손짓으로 피아노를 부렀다. 연주가 계속될수록 정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누구도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야릇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정우의 모습과 함께 1악장이 끝났다.
“아! 지네트! 밤새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연주하고 싶어. 아니 연주하다 죽고 싶어! 연주하다 죽은 다음에도 계속 연주하고 싶어.”
정우가 울먹였다. 하지만 말과 달리 몸은 피아노 앞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아니. 그런데 지금은 좀 쉬어야겠어. 이 페이스로 연주했다간 내가 남아나지 않겠어. 지네트랑 연주 하는 거, 너무 어렵다. 중노동이야. 영혼의 중노동.”
피아노 앞에서 물러난 정우는 그야말로 무더기로 꽂혀 있는 음반들 중 아무거나 한 장 쑥 뽑아 전축에 올렸다. 공교롭게 칼 뵘이 지휘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었다.
“어머!”
뜻밖에 울리는 진혼곡을 들은 지네트의 입에서 불길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정우도 당황한 모습으로 스피커에 몸을 맡긴 듯이 섰다.
“아! 이 깊은 슬픔과 원망은 누구를 조상하는 음악이란 말인가?”
정우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신파조로 중얼거리더니 스스로 대답했다.
“20세기를 일기로 숨을 거두어 버린 음악을 조상하는 음악이구나. 음악이 음악을 조상하고 있구나.”
지네트가 넋두리 하는 정우를 잠시 바라보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사뿐사뿐 정우 등 뒤로 다가갔다. 가늘고 긴 팔이 덩굴처럼 뻗어 정우의 겨드랑이를 파고들고 가슴을 감싸 안았다. 피부를 통해 지네트를 느끼는 순간 정우의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크게 무너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누구에게 들려주는 레퀴엠이야?”
지네트가 속삭이자 그 숨결이 정우의 귀를 간지럽혔다.
“나.”
“뭐?”
“내 영혼. 아! 불쌍한 권정우의 영혼!”
정우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뒤로 돌아섰다. 지네트가 그 품안에 얼굴을 묻었다.
정우가 중얼거림을 계속했다.
“지네트 앞에서 열 여섯 해도 못 살고 요절하고 마는구나.”
그러자 지네트가 정우의 품에 더 강하게 안겨왔다. 지네트의 서늘한 두 손이 정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정우는 지네트의 숨소리가 통제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포코 아 포코 크레센도와 아첼렐란도.
‘왜 이러지? 지네트가 왜 이런 행동을 하지?’
정우 머리 안에서 갖가지 생각이 뛰어다녔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네트와 함께 연주한다면 잃어버린 그 스포트라이트를 다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지네트가 품 안에 안겨 들어오고 있었다.
‘지네트를 가져. 기회를 놓치지 마.’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는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맙소사! 이 따위 천박한 생각이 떠오르다니!’
“m'embrasser, m'embrasser!”
그런 정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네트의 입에서 프랑스어가 마구 튀어나왔다.
정우의 이성이 혼미해졌다. 난데없이 성모가 허공을 걸어 정우를 향해 둥둥 날아왔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 모습은 마치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같았다. 성모가 정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성모. 마리아. 마리아? 최나경!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정우의 입에서 거대한 고함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몸통을 감고 있는 지네트의 손을 거의 뜯어내듯이 뿌리쳤다. 그 바람에 지네트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 앉아 정우를 올려 보았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래서는 안돼. 절대.”
정우는 마치 엄청난 다짐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다. 정말 아니다. 누나와 함께 있을 때 주목받던 오누이, 슈퍼스타 아녜스의 파트너, 다시 평범한 고교생. 그런데 이번에는 지네트? 맙소사!
정우는 피아노에 반사되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경멸스러웠다. 토가 나올 것 같았다.
피아노에서 번쩍이는 자신에게 따져 물었다.
“넌 대체 피아노를 왜 치는 거야? 응?”
그림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지네트 등이나 쳐서 알량한 명성이나마 되찾자고? 너 어쩌다가 이렇게 형편없는 존재로 내려앉았어? 말해 봐!”
정우가 계속 피아노에 반사된 그림자에게 말하는 동안 지네트가 맥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정우의 그 고함은 오직 내면에서만 메아리 쳤기에 지네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네트가 뭔가 두려워하는듯한 얼굴로 말했다.
“어딜 보는 거야? 왜 날 보지 않아? 갑자기 내가 싫어졌어?”
그제서야 정우는 피아노 속의 자신의 그림자에게서 벗어났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그런데 왜?”
“네가 너무 좋아. 미안해. 그래서 미안해. 나는 깨달았어.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를 절대 사랑할 수 없어. 그래서 미안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우가 마치 쉴러를 공연하는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너를 사랑해. 최상급으로 사랑해. 그래서 그 사랑을 체화 할 수 없어. 그건 최고의 사랑을 오염시키는 것이니까. 나는 그 사랑을 형상으로 남겨두고 싶어. 그 형상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고 예술 그 자체야. 너를 숭배해. 너의 육신을 탐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욕이야. 난 너를 뮤즈로 숭배하고 싶어.”
그러자 지네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 속에 억울함과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질식시켜. 그런 것들이 나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해. 그런 것들 때문에 난 누구도 마음을 열고 사귈 수 없어. 이렇게 태어나게 해 달라고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해?”
“그 어떤 천재도, 그 어떤 신도 자신이 선택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어. 그러나 태어난 순간부터 그 의무는 멍에처럼 짊어져야 해.”
지네트가 날카롭게 항변했다.
“칼리오페는 아폴론의 연인이었어!”
“난 아폴론이 아니야.”
“칼리오페는 인간 오이그라오스와 아들 오르페우스를 낳았어.”
“하지만 그들은 사랑하며 살지 않았어. 단지 오르페우스를 낳았을 뿐이야.”
“넌 잔인해. 너무 잔인해.”
지네트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한동안 침묵. 그리고 다시 지네트의 목소리.
“너, 아직도 아녜스 사랑하니?”
그 말에 뭔가 말하려고 하던 정우가 갑자기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제서야 아녜스가 단지 미국으로 떠나갔을 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들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점점 희석되어 갔을 뿐이다. 원래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공식적으로 마침표 찍고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녜스는 출국장에 들어서기 직전 분명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
그런데 정우는 불과 몇 주 전에 나경의 손을 잡았고, 방금 지네트와 키스 직전까지 갔다.
평소 무의식 속에 잠잠하게 잠들어 있던 테오필루스 형제가 벌떡 일어서서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난잡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냐고? 이 음란한 죄인아.”
테오필루스 형제의 질책하는 목소리가 정우의 머릿속을 하피처럼 활퀴며 날아다니더니 피아노에서 반짝이고 있는 디누를 향해 날아갔다.
결국 정우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모르겠어.”
“그럼 나경이는?”
정우는 아예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 역시, 그랬구나.”
지네트의 톤이 체념조로 떨구어졌다.
“아! Cosi fan tutti maschi(수컷들은 다 똑 같아)! 다들 예쁜 여자를 찾는 거네. 아녜스도 나경이도. 나도 인정해. 아녜스는 예뻐. 나경이는 아녜스보다 더 예뻐. 난 예쁘지 않아.”
그리고 어색함이 감도는 답답한 침묵.
“나, 갈게.”
한참만에 정우가 몸을 일으켰다. 지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우는 대답을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냥 뒤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100미터 밖에서 아주 작은 소리의 변화도 감지하는 그 타고난 예민한 귀에 눈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뒤 돌아보지 않고 지네트 집을 나섰다.
집을 다 나선 다음에야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 무슨 짓을 했지? 지금 처참한 모습으로 팽개치고 온 저 소녀는 그냥 소녀가 아니다. 늘 부러워하면서 존경했던, 온 인류가 보물처럼 아끼고 보존해야 할 음악의 천재 지네트다.
그런데 이 어색한 결과는 대체 뭐지? 몇 세기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천재 음악가의 가슴에 긁어 놓은 이 참혹한 상처를 무엇으로 보상하지?
정우는 달렸다. 미친듯이 달렸다. 조금이라도 지네트의 자기장에서 벗어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