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소설 디누 2부 1권 7화 잔혹한 예술 1
잔혹한 예술
1
정우를 내려놓은 버스가 힘에 부친 소리를 내며 반포 방향 언덕길을 넘어갔다. 차체가 부르르 떨리는 것이 당장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멈춰서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뒤로하고 정우는 언덕길을 반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E 독서실’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나타났다.
2층으로 껑충껑충 계단을 뛰어올라가자, ‘버클리실’, ‘하버드실’, ‘스탠포드실’등 미국 유명 대학이름을 붙인 문패들이 닥지닥지 붙어있는 독서실 입구가 나타났다.
적어도 이름표 상으로는 이 좁은 공간에 미국 대륙의 동쪽 끝 매사추세츠에서부터 서쪽 끝 캘리포니아까지 총망라되어 있었다. 이 북미대륙 한 가운데 대평원쯤 되는 위치에서 사무적인 표정으로 무엇인가 골똘히 읽고 있는 총무의 모습이 보였다.
“자리 있어요?”
정우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어떤 방?”
총무 역시 퉁명스럽게 받았다.
“버클리 실이요.”
“자리 있어. 전교 석차는?”
“10등. 여기 성적표.”
“그럼 한 달에 3만원만 내.”
“여기 3만원.”
정우가 사무적으로 3만원을 들이 밀었다.
“사물함 열쇠는 이거. 번호는 버클리 실 35번.”
총무가 집어 던지듯 열쇠를 내 주었다.
정우는 가방을 덜렁거리며 북미대륙을 횡단하여 버클리실 문을 열었다.
분위기 파악을 위해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공부하는 학생보다 자리 채우고 있는 빈 가방이 더 많았다.
그런데 나경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 가방들 중 하나의 임자일것이다.
뭐, 기다리면 오겠지. 정우는 지정좌석을 찾아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서 잠시 멍하니 방문만 바라보았다. 10분 정도 지나니 버클리 실 방문이 열리고 나경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경이 자기 자리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내려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우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정우와 눈이 마주치자 두 손을 올라가더니 뺨을 감쌌다.
“왔어?”
빰을 감싸고 다가오는 나경에게 정우는 이 두 글자의 건조한 말을던질 뿐이었다. 할 수 없이 나경도 건조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왔다. 휴게실 갈래?”
“잠깐 기다려. 그래도 공부는 좀 하고 가야지.”
“피. 멋대가리 없어.”
나경은 하는 수 없이 입을 한번 비죽거린 뒤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공부할 마음은 전혀 없고, 가방에서 아버지를 졸라 받아낸 최신형 AIWA 카세트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멘델스존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가 흘러나왔다.
그 유려하면서도 비극적인 멜로디의 흐름을 따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각들은 이리저리 흘러가다 결국 정우라는 연못에 모였다.
정우는 이상한 아이다. 남학생들, 심지어는 남교사들조차 나경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고, 그런 남정네들에게 콧방귀를 뀌며 이리 저리 놀려 먹는 것이 나경의 취미생활이었다. 나경은 정우처럼 자기 앞에서 저렇게 제 멋대로 행동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내가 왔으니 그 다음은 너 알아서 해라 이런 식이다. 뭘 믿고 저렇게 도도한 걸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멘델스존 교향곡이 4악장의 영웅적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절정의 감정을 만끽했다. 그런데 멘델스존이 직접 쓴 부분이다 아니다 논란이 많다는 코다로 넘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음악 소리가 팍 하며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정우가 이어폰을 뽑아 들고 빙글빙글 웃으며 서있었다.
“나 공부 끝났다. 넌?”
“나야, 뭐. 훗. 뭐, 시작을 안했으니 끝날 것도 없지.”
“그래? 그럼, 휴게실이든 어디든 아무 데나 가서 놀자. 네가 노는 비용 다 대 준 댔지?”
“그건 네가 공부 가르쳐 줄 때 얘기지.”
“아니, 공부 배울 놈이 따로 있지. 나한테 배우겠다고? 오석이라면 몰라도.”
“권오석 걔?”
“아, 너도 걔 알지?”
“알아. 그 지루한 범생이. 뭐, 그래도 나름 귀여운 애니까. 그래. 걔도 불러서 같이 하자고 해. 어때?”
“안 그래도 불렀어. 좀 있으면 올 거야.”
“와, 신난다. 우등생들 과외 받겠네.”
“하지만 일단 좀 놀고.”
휴게실에 들어서자, 그 일대 유일한 남녀 합반 독서실 답게 짝을 지어 웅성거리는 암수가 군데 군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많은 소녀들 중 나경의 미모는 단연 군학일봉이었다.
정우는 나경 앞 테이블에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내가 그렇게 이상해?”
“아니.”
“그런데 넌 꼭 이만치 떨어져서 보더라. “
“이게 미술 작품 감상할 때 제일 좋은 거리라서.”
“어, 그러셔? 지금 작업 거는 거야?”
“빈 말 아니야.”
“그래? 그럼 단도직입 해 볼까? 5초 안에 대답해. 내가 더 이뻐, 아녜스가 더 이뻐?”
“아, 그건.”
정우가 우물쭈물하자 나경이 의자를 정우 가까이로 확 끌어 당겨 앉으며 말했다.
“거 봐요. 디누 씨. 그런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작업 멘트는 삼가해 주세요.”
“아, 거. 참, 너. 아까 그 카세트 엄청 비싼 거던데?”
정우가 급히 말을 돌렸다.
“말 돌리는 거 봐. 그게 뭐 그렇게 궁금해? 아빠 졸랐어.”
“잘 사나 봐. 아빠 조른다고 그런 물건이 턱턱 나오고.”
“난데없이 웬 호구 조사? 내가 최유선 언니라는 거 알고 있으면, 어차피 다 알고 있는 건데 뭘 또 물어봐?”
“응. 엄마가 서울대 김정미 교수라는 거 알고, 두 자매 알고. 그런데 아버님은 모르거든.”
“아빠는 내과 원장님이야. 이제 시원해?”
“아, 그렇구나. 엄청 참, 말 나온 김에 유선이 요새 뭐해? 유선이도 불러서 같이 공부할까? 요즘 내가 음악판에 안 나서다 보니, 유선이 못 본지 한 일년 된 것 같네.”
“싫어. 유선이한테 웬 관심? 꿈 깨라. 유선인 키가 너보다 더 클지도 몰라. 넌 딱 내 사이즈야. 그런데 너 이제 보니 엄청 밝힌다! 하긴 나하고 처음 만날 때도 헌팅이었지?”
“뭐, 밝히는 게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두루 만나고 싶어하지.”
“그럼 잘됐네. 오늘도 한 번 두루 만나 볼래?”
“엥? 그건 또 뭔 소리야?”
“유럽 가 있던 친구가 얼마 전 귀국했는데, 너 꼭 보고 싶다고 해서.”
나경이 휴게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발딱 일어섰다.
“오늘 저녁 약속 했는데 기왕 온 거 너도 같이 가. 완전 서프라이즈 되게. 너도 걔도 다 서프라이즈 될 거야.”
“지금?”
“그래 지금. 러브리에. 시간 좀 남지만,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지 뭐. 아예 짐 싸서 가자.”
“도대체 어떤 애야?”
“만나면 깜짝 놀랄 걸? 걔도 놀랄 거고.”
“누군데?”
“엄마끼리 친구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지냈어. 여튼 보면 알아.”
“힌트 살짝 주면 안될까?”
“안 돼.”
“예뻐?”
“직접 확인해.”
때 마침 오석이 헐레벌떡 독서실로 들어왔다.
“미안. 좀 늦었어.”
정우가 막 들어오는 오석을 붙잡고 독서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오석아, 미안. 나가자.”
“오자 마자 뭔 짓이야?”
“너, 어차피 너희 집에서 한참 떨어진 여기 독서실까지 나오겠다고 한 거, 공부 때문 아니고 최나경 보러 온 거잖아? 그러니 나경이 가는데 따라 가야지.”
“야, 왜 사람을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
“하여간 좀 같이 가자. 내가 좀 어색해서 그래.”
할 수 없이 오석은 독서실에 짐도 풀지 못하고 도로 밖으로 끌려 나와야 했다. 그들은 강남역 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다가 중학교 시절 그들의 아지트였던 추억의 ‘러브리’로 들어섰다.
“나경아. 여기!”
한 귀퉁이에서 구슬같이 맑은 소프라노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날린 정우와 오석의 눈과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정우야, 쟤, 쟤 말이야, 혹시.”
“아, 나도 그 생각 하고 있긴 했는데.”
깜짝 놀라는 두 소년을 보며 나경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혹시가 아니라 역시야. 어때? 서프라이즈지?”
“맙소사. 그럼 지네트?”
“응. 지네트.”
“그 지네트?”
“응. 그 지네트.”
“네가 어떻게?”
“ 그 말 좀 이상하다. 내가 어떻게 지네트랑 친구냐, 이런 말이야?”
정우가 난처하게 나경과 지네트를 번갈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경이 정우를 날카롭게 노려본 뒤 지네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네트도 깜짝 놀란 얼굴로 정우를 노려보았다.
“설마 디누?”
“맞아. 얘가 디누야. 야! 인사해!”
나경이 강제로 정우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안녕. J 고등학교 1학년 1반 권 정우야.”
정우가 쭈뻣거리며 인사 비슷한 것을 했다.
“반가워. 난 지네트, 한국에 왔으니까 강소정. 둘 중 아무거나 편한 대로 불러.”
차가운 수정 구슬을 유리판 위에 쏟아놓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정우는 약간의 현기증에 저항하며 그 유명한 지네트의 모습을 찬찬히 훔쳐보았다.
그 엄청난 연주에 비해 뜻밖에도 왜소한 체구,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그 위에 색이 옅은 입술이 자리 잡아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 그러나 숱이 적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희미한 눈썹까지 가세하니, 어찌 보면 신경증 환자 같아 보였다.
확실히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꾸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얼굴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커다란 눈 때문이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들여 볼 것 같은 깊고 맑은 눈.
정우는 저도 모르게 그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그 눈을 계속 마주하면 속마음은 물론 무의식까지 다 읽힐 것 같았다. 옆을 슬쩍 보니 오석 역시 감히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참, 나경아.” 지네트가 이번에는 나경을 보며 말했다. “너희 사귄 지 얼마나 되었어?”
“어머, 사귀다니? 아직은 아니야.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다고. 얘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아녜스랑 죽고 못 사는 사이였는데? 둘이 하도 찰싹 붙어 다녀서 그 사이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못 들어갈 정도였어. 어머, 미안. 아녜스 얘기 안 한다고 약속했는데...”
“아녜스랑 정말로 사귄거야? 연주만 같이 한 게 아니고?”
지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정우가 수줍게 대답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사귀었지. 그리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깨졌고.”
“참 궁금하네? 아녜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정말 바이올린 접었어?”
“완전히.”
“왜? 아녜스 같은 애가 아깝게 활을 내려? 안 그래도 미우 언니마저. 아, 미안.”
지네트가 갑자기 입을 닫자 정우가 한숨을 내쉬더니 할 수 없다는 눈 빛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미 벌어진 일인데 뭐. 온 세상이 다 알고. 그래. 아녜스랑 같이 큰 공연을 열었다 망했어. 첫 소절부터 망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날로 아녜스는 쪽팔려서 바이올린 때려 치웠지만, 난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이렇게 아무도 알아주지도 들어주지도 않는 피아노를 치고 있어.”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공연이야 망칠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것 때문에 활을 꺾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그래서 물어본 거야.”
“나도 몰라. 어쨌든 다 지난 일이야. 아녜스는 이제 물리학자인지 엔지니어인지 되겠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물리학자? 왜?”
“수학이 너무 좋다나? 바이올린을 좋아하지만 그걸로 인생을 채울 생각은 처음부터 아니었대.”
“하긴 워낙 머리가 좋으니까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었겠지. 나쁘지 않은 선택 같은데? 참, 그런데 네 피아노는 아직 멀쩡해? 취리히 이후 2년 넘게 제대로 된 공연 안 했잖아? 아녜스 반주한 거 빼면.”
“뭐 그런대로.”
“한번 들어보면 안 될까?”
지네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정우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러브리’의 자랑거리인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모차르트의 c단조 판타지가 울려 나왔. 피아노 소리기 들리자 화들짝 놀란 직원이 잔소리를 하려다 피아노 단골 정우를 알아보고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악보에 충실한 듯 하면서 템포와 강약의 변화가 풍부한 묘한 연주였다. 마치 악보가 머리 속에서 한 번 정화된 뒤 손가락을 통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악보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연주자와 피아노가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듯한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보 상으로는 조금의 오차도 없는 이율배반적인 연주. 그 이율배반이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과 쾌감이 연주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아아. 살아 있네.”
지네트가 읊조렸다.
“사람들은 거품이라던데? 미우 언니 후광 없이는 어렵다고.”
나경이 한 마디 거들자 지네트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넌 저런 연주가 누구한테 배워서 된다고 생각하니?”
“나야 들어 봐야 아무것도 모르지. 유선이라면 모를까?”
“아, 유선이? 그래. 유선이라면 잘 알겠지. 참, 나경아. 너 디누랑 연주해 본적 있어?”
“어? 아. 같이 연주? 응. 있어.”
나경이 당황하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떤 곡?”
“모차르트 G장조 콘체르토.”
“그건 피아노 파트가 오케스트라 편곡이라 제대로 된 2중주 라고 하기엔 좀 그런데. 뭐 할 수 없지.”
그러는 동안 정우는 계속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었고, 곡목도 모차르트의 환상곡에서 쇼팽 발라드 1번으로 넘어가버렸다. 밤이 새도록 연주할 기세였다.
지네트는 이상한 미소 비슷한 것을 얼굴에 담은 체 정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가끔 정우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무슨 텔레파시라도 주고받는 듯한 야릇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20분 이상 미친 듯이 피아노를 두드리던 정우는 마침내 로코코 풍의 즉흥연주에 이은 간단한 코데타로 연주를 마쳤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돌아오는 정우를 향해 지네트가 손바닥이 빨갛게 될 때까지 박수를 쳤다. 멍하니 있던 직원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너무 훌륭해.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이걸 사람들이 왜 모르지? 그런데 디누.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할까?”
“놀이 좋지.”
“ 미우 동생이니까 바이올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네트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었다.
“글쎄. 누나한테 레슨 받기도 했고. 웬만큼은 할 줄 알아.”
지네트가 정우를 향해 바이올린을 쑥 내밀었다.
“한 번 해 봐. 잘 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피아노를 쳐 볼게.”
“해보지. 뭐.”
정우가 바이올린을 받아 들자 지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모차르트 G장조 콘체르토의 인트로 부분을 연주했다. 정우도 나경도 지네트가 원래 피아노에서 바이올린으로 전향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바이올린을 턱에 낀 정우는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맙소사!
그 모습을 보던 나경은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느낌을 받았다. 피아니스트인 정우 연주가 명색이 바이올린 전공인 자신보다 훨씬 훌륭했기 때문이다. 정우의 솜씨는 바이올린으로도 능히 명문대 입학이 너끈할 정도였다.
나경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대로 정우와 지네트의 연주는 점점 무르익었다. 정우는 갑작스런 지네트와의 만남에 놀란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점점 신을 내며 활을 긁었다. 지네트는 그런 정우를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건반을 두드렸다.
나경은 자신이 마치 그들 사이에 낀 이 물질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위해 눈을 이리 저리 돌렸다. 그러다 문득 오석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오석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런 오석이 불쌍했다. 나경은 자신이 이 자리에 낀 이물질이라면 오석은 아예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나경조차 오석이 같이 왔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 정도였다.
‘제 정신이야? 누가, 누구를 동정하는거야?’
나경이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석은 동정받을 처지의 학생이 아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고, 디누가 하는 수준높고 어려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아이다. 오석의 처지는 절대 나경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나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와 지네트가 어느새 원래 자리로 바꿔 정우는 피아노를 지네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곡도 계속 바꿔가며 연주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연주할 생각인지 끝도 없이 연주했다.
그들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연주는 마침내 러브리에 손님들이 들어오고, 손님들이 그2중주를 궁금해 하다 지네트와 디누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마무리 되었다.
연주를 마치고도 두 사람은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꿈꾸는 듯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둘 사이에 아지랑이가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것 처럼 공기가 흔들렸다.
나경의 입 안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신음소리는 입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다시 삼켜졌다. 초겨울의 밤이 점점 차갑게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