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장편소설 디누2부 1권 8화 잔혹한 예술2
2
“정우야! 패스!”
오석이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움직여! 움직여야 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정우가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 수비수에 등을 지고 맞고함을 쳤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던 3반에게 이렇게 고전하게 될 줄은 몰랐다. 3반은 호흡이 척척 맞는 조직적인 플레이로 개인기만 믿고 날뛰던 정우네 반을 꼼짝 없이 얽어 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잠깐 빈틈이 났다 생각한 정우가 몸을 훽 돌리며 인프론트 킥으로 공을 강하게 감아 찼다. 의외로 발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가 찬 공이 팽팽한 직선을 그리며 골문 구석을 향해 날아갔다.
‘골이다!’
정우는 요란한 세레머니를 준비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전학 왔다는 3반 골키퍼 녀석이 날렵하게 몸을 날리며 골문 안으로 거의 다 들어간 공을 쳐내 버렸다.
“와, 또 이러네? 저 전학생. 한 세 골 막았나?”
오석이 정우를 잡아 일으키며 전학생을 가리켰다. 정우가 손을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저 새끼 혹시 선수 하다 온 놈 아니야? 슛이란 슛은 다 막는데 무슨 수로 이겨? 야. 반장 놈아. 내기는 왜 걸었어? 돈 날리게 생겼네.”
“저런 놈이 갑자기 전학 올 줄 내가 알았겠냐?”
“시간 다 됐다. 졌다.”
정우가 운동장에 풀썩 앉으며 먼지를 일으켰다. 3반 녀석들이 좋아라 펄쩍펄쩍 뛰고 있는 모습을 멀거니 보던 정우에게 웬 그림자가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일어나.”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그 골키퍼 녀석이었다.
“너 잘하긴 잘 하더라. 우리 처음이지? 난 권정우야. 넌?”
“난 성진이야.”
“성은?”
“성이 성, 이름이 진.”
“그래? 진! 하하. 반갑다 진.”
“그래 나도 반갑다.”
“뭐가 반갑냐?”
“전학 올 때부터 너하고 말해보고 싶었으니까. 쭉 독일 살다 올해 처음 한국 왔는데, J고등학교 간다는 거 알고 제일 먼저 생각 나는게 너더라.”
“날? 왜?”
“나, 음악 좋아하거든. 나하고 또래로 보이는 한국 아이가 유럽의 어른들과 당당히 피아노로 겨루는 모습 보고 감명 받았어. 뮌헨에서, 루쩨른에서, 쮜리히에서. 디누!”
“하하. 난 남자녀석들이 그렇게 말하면 안 믿어. 솔직히 말해. 너 누나 팬 아니면 아녜스 팬이었을거야. 난 부록이고. 안 그래?”
“아녜스는 솔직히 별로. 미우는 정말 좋아했고. 그리고 지금은 지네트 팬이고. 하지만 디누라는 이름이 그리 만만한 이름이 아닐텐데?”
“그거야 뭐 옛날 얘기지. 지금은 J고등학교의 그냥 그런 1학년 학생일 뿐이야. 어쨌거나 배고픈데 좀 먹자. 야, 오석아! 밥 좀 사라.”
“야, 벌어 놓은 돈도 많은 새끼가 맨날 나한테 밥 사달래? 그리고 사줘도 아니고 사라?”
“새 친구 사귀는데, 반장이 쏴야지.”
“우리 반도 아니잖아?”
“독일에서 쭉 살다 왔다잖아? 동포한테 내 반, 네 반을 따져?”
“하여간 너랑 말싸움하자고 덤빈 내가 바보야.”
오석이 투덜거리며 정우와 진을 따라 나섰다.
그들은 15분가량을 걸어 개포5단지 상가에 있는 ‘삼국지’란 중화 요리집으로 들어섰다. 자장면 곱빼기를 한 그릇씩 먹고 탕수육까지 나눠 먹고 나니 이팔청춘들이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포만감이 느껴졌다.
진은 먹는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펼쳐 놓았고 정우와 오석은 그 해박하고 풍부한 지식에 계속 감탄하느라 음식을 제대로 씹었는지 그냥 삼켰는지도 모르고 귀를 기울였다. 진의 이야기 주제는 너무 범위가 넓어 거의 백과사전에 가까웠다. 철학 이야기, 음악 이야기, 문학 이야기, 정치 이야기, 심지어 축구 이야기 까지.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을 정도로 모르는 분야가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듣다 밖에 나서니 이미 별이 총총한 밤이 되었다.
“늦었네?” 오석이 먼저 시계를 봤다. “나 먼저 가야겠다.”
“같이 가자. 그럼. 진. 너희 집은 어느 쪽이야?”
“대치동. 청실아파트.”
“그래? 그럼 걷자.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대치동에서 오석이는 87번 타던가 마저 걷고, 난 288번 타면 돼.”
“좋아.”
“나도 콜.”
그들은 소화가 되어 가는 느낌을 즐기며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 난 네가 마음에 들어.”
갑자기 정우가 딱 잘라 말했다.
“왜?”
“머리와 가슴에 품은 것이 많아서.”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걸 알아?”
“그 정도 이야기 했으면 알지. 사실 나는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이 보는 순간 사람을 판단 할 수 있어. 정확도는 적어도 최소 80% 이상. 자, 이번에는 네가 말해봐. 나 만난 소감.”
“예상했던 대로야.”
“거 참 애매한 표현이네? 그럼, 애초에 무슨 예상을 했는데?”
그러자 진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
“세상을? 내가? 뭘 가지고?”
“뭔 소린지 알겠다.”
오석이 끼어들었다.
“그래. 똑똑한 오석이가 해석 좀 해 줘라.”
”진이는 지금 예술가로서 정우에 대해 말하는 거야. 디누를 말하는 거지.”
“맞아.”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우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사절하겠어. 난 피아니스트고, 작곡가야. 가끔 문학 한답시고 똥글을 쓰기도 해. 하지만 그걸로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가 가장 행복해. 그 뿐이야. 거기에 세상을 이러니 저러니 하는 무슨 거창한 이유를 붙이는 건 싫어. 음악은 음악일 뿐,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건 하느님을 욕 보이는 거야!”
갑자기 오석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터뜨렸다.
“야, 무섭다. 거기에 하느님이 왜 나와?”
“나도 오석이 말에 동의해. 생각해봐 정우야. 넌 너의 그 재능이 설마 너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 재능을 네가 만들었어? 아마 태어났는데 이미 장착되어 있었던 것 아니야?”
“그 말은 맞아. 나도 내 재능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왜 그런 선물을 했을까?”
순간 정우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날 사랑 하거든.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법은 좀 묘해. 사람을 괴롭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괴롭혀. 내 재능도 그래. 재능이 크면 클수록 더 괴로워. 무서운 병을 완치했는데 오히려 죽는 것 보다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누나가 그렇고, 지금 내가 그렇고.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 너무 사랑해서 혹시 놀리는 건 아닌가?”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과 고통을 선물하시지.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봐. 하느님이 너에게 재능을 내렸다면 그건 분명 이 세상에 쓰임이 있기 때문이었을 거야. 너 즐겁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넌 그 재능 때문에 괴롭게 살 수도 있는 거야.”
“정말 묘한 사랑이네. 난 싫다. 그런 사랑.”
“누구보다 사랑했을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잖아? 인간을 위해?”
“내가 예수님이냐?”
“언젠가 이해하게 될 거야. 지금의 고통과 시련이 결국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넌 네 재능을 제대로 쓸 생각은 안하고 투정만 부리고 있어. 세상에 베풀 생각은 안하고 세상이 박수 쳐주지 않는다고 삐쳐 있다고나 할까?”
순간 오석이 손뼉을 치며 엄치를 치켜 올렸다.
“와, 너 정말 멋지다. 정우를 말빨 로 제압하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어. 최고야, 최고.”
“그럼 나. 네 말 대로라면.” 정우가 갑자기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천벌 받겠네?”
“지금처럼 산다면, 아마도.”
“이거 좀 찔리는 걸? 앗, 잠깐.”
정우가 갑자기 말을 끊으며 눈을 부릅떴다.
“왜?”
“저 소리.”
“뭐?”
정우가 가리키는 쪽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진원지를 추적해 보니 양재천 입체교차로 근처에 있는 공터였다. 공터에는 도시개발 아파트 공사한다고 조성해 놓은 야적장이 있었는데 그 어귀에서 나는 소리였다.
“너도 들었냐?”
“그래.”
“가보자.”
그들은 비명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갔다.
“앗, 저거!”
“오! 마인 고트!”
그들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섰다.
야적장이 있는 공터에 불량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불량배들은 한 14, 15세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와 사내아이를 붙잡아 놓고 있었는데, 사내아이는 이미 한 바탕 매를 맞았는지 무릎을 꿇은 자세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잠깐!”
진이 뛰어들려는 정우의 소매를 잡아 끈다.
“뭐 하려고? 파출소에 가서 신고하자.”
정우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럼, 너무 늦어. 내가 지금 당장 저놈들과 맞짱을 떠서 시간을 벌어 놓을테니까 너흰 파출소로 달려가던가 가까운 공중전화라도 찾아서 신고해. 그럼 내가 맞아 죽기 직전에 경찰들이 오겠지. 뭔 소린지 알았어?”
“야, 그래도 그렇지.” 오석이 덜덜 떨었다. “쪽수를 봐. 열 명은 넘겠다. 생긴 걸 봐. 전부 날라리들이야.”
“걱정 마. 내가 예술 뿐 아니라 이 주먹으로도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증명해 보일 테니까. 그러니까 나 죽기 전에 짭새 들이나 몰고 오라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정우는 굴러다니는 각목 하나를 주워 들고 맹렬하게 돌격했다. 그 모습을, 그리고 정우가 단번에 몇 놈을 때려눕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틈에 떨고 있던 계집아이가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은 있는 힘을 다해 파출소를 향해 달렸다.
이때 오석이 손에 돌을 들고 정우가 치고 박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미친놈, 넌 왜 따라와?”
정우가 짜증과 걱정이 반씩 섞인 얼굴로 돌을 들고 달려오는 오석을 봤다.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그리고 다시 빨개졌다. 하지만 끝내 암흑 천지가 되었다.
기왕 컴컴해진 거, 잠이나 자자. 아니, 이 상황에서 잠이라고?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밝은 빛이 화살처럼 정우의 얼굴을 쏘아댔다.
정우는 견디지 못하고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어딜까?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얀 벽들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천국일까?
정우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불량배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치열하게 치고 박으며 싸웠다는 것이다.
언뜻, 그 놈들 중 몇몇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정우 역시 그 놈들 중 누군가의 칼을 빼앗아 마구 휘둘렀던 것 같지만 자사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오석이 서투르게 돌을 휘두르다 불량배의 주먹 한 방에 실신하는 것도 봤다. 그리고 뭔가 사이렌 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권정우. 나를 보라.”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청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누구시죠?”
정우가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불량배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네가 기다리던 아니 너를 기다리던 사람이라 해야 옳겠구나.”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리 비치고 청년의 모습이 흐물 거리기 시작하더니 좀 더 각지고, 좀 더 단호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마치 마사치오가 그려 놓은 예수 같았다.
예수 같아 보이는 형상이 준엄한 표정으로 마치 심문하듯 말했다.
“너는 무슨 짓을 했느냐?”
정우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무슨 짓이라뇨? 가련한 아이들을 구하고 나쁜 놈들과 싸웠죠.”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들을 칼로 찌르고 베었는가?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었는가?”
“무슨 말씀을 하세요? 칼은 그 놈들이 먼저 휘둘렀어요. 아니, 뭐, 그게 아닌들 뭐가 문제랍니까?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인간쓰레기 청소 하는 정도 아니었나요?”
“아, 견디기 힘든 말이로다. 너의 그 오만함이 하늘나라를 더럽힐까 두렵도다.”
“오만함이라고요? 네, 말씀 참 잘하셨어요. 그래 어디 한 번 따져 볼까요? 당신이 정말 그 분이라면 말입니다. 누나 아시죠? 미우 누나? 누나는 오만한 저랑 달라서 정말 겸손했거든요. 그리고 아시죠? 당신을 정말 사랑했다는 것? 정말 대단한 연주를 했고 그것을 모두 당신의 영광에 바치는 그런 존재였다고,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겸손한 존재였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그게 겸손의 댓가라면 난 차라리 오만하게 살겠어요. 아니 당장 당신부터 생각해 봐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그리고 어리석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모욕하고 팔아 넘길 때 얼마나 당신이 무력했는지. 당신이 무력하니 당신을 믿는 사람들도 무력하고, 저런 불량배들이 설치는 거라고요.”
“아아! 너는 아직 마음 속에 악의 씨앗을 너무 많이 남겨 두었구나. 아직은 너를 내 왕국에 들일 수가 없다. 돌아가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오너라.”
“공부라고요? 젠장. 여기서도 공부 소리를 들어야 하나?”
정우가 볼멘 목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예수는 아무 말 없이 점점 흐려지다 희부연 덩어리로 바뀌었고, 마침내 노란 불꽃이 되었다.
불꽃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이리저리 춤을 추며 흔들리더니 다른 형체를 만들었다. 형체는 점점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 가더니 마침내 의사의 모습이 되었다.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의사가 말한다.
“단순 자상에 타박상입니다. 이제 출혈 쇼크도 벗어난 것 같으니 약 이주 정도 안정만 취하면 됩니다.”
그리고 바쁜지, 아니면 바쁜 척을 하는 건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이 바보 문디야.”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그런데는 왜 끼어들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정우는 느긋하게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었다. 오히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잠들자마자 또 한바탕 예수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 설교를 듣다 간신히 눈을 뜨니 이번에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나경의 모습이 보였다.
“아. 나경아, 어서 와.”
정우가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든다.
“날 금방 알아보는 것 보니까, 머리통이 아직 멀쩡한 모양이네.”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나경이 가볍게 손을 흔든다.
“뭐, 별로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들어왔어? 우리 어머니는 아녜스 사건 이후, 내가 여자 만난다 그러면 최후의 심판이라도 보듯 할텐데?”
“내가 같이 왔으니까 그렇지.”
갑자기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정우가 깜짝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담임이 우뚝하니 서있었다.
“아!”
“이 학생이 병실 근처에 있다 같이 가게 해달라고 계속 졸라대더구나. 그래서 어머니한테는 내 딸이라고 말씀드렸다. 정우 네 이놈. 담임이 거짓말까지 하게 만들고. 내 참. 그나저나 애인이냐?”
“그게 음.”
“이크 내가 나이 먹더니 눈치가 없어졌군. 둘이 시간 좀 가지거라. 난 너희 부모님 붙들고 식사하며 시간 벌어주마.”
나이가 50이 한참 넘은 담임은 조그마한 놈들이 별 짓 다 하네, 그나저나 무척 재미있군 하는 표정을 지으며 병실에서 급히 나가버렸다.
“웬일이냐. 담임이 분위기 파악을 다하고.”
“뭐? 분위기? 야!”
나경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이크. 갑자기 왜 그래?”
“이 바보야! 왜 몸을 함부로 굴려?”
“아, 그거야.”
“시끄러. 네가 무슨 생각을 했건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붕대 칭칭 감고 누워 있는 걸 보니까,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네가 알아? 이… 이…바보….”
나경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눈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나며 정우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붕대 위로 툭툭 떨어졌다. 눈물방울에 젖은 부분이 묘하게 따뜻했다. 마치 나경이 자신의 체온을 전해준 것 같이 느껴졌다.
정우는 그 온도를 느끼며 갑자기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자신의 깊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감정. 기억에 생생한 감정.
하지만 정우는 이 감정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벗어나야 했다. 이 느낌을 떨쳐야 했다.
그렇다면 일단 나경을 달래서 눈물을 멈추어야 한다.
정우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 넌 웃는 모습이 예뻐. 우는 모습 하나도 안 어울려. 아달지자는 눈물로 더 아름다워 질지 몰라도, 넌 아니야.”
“아달지자는 또 뭐야?”
“아, 미안. 그냥 넌 웃어야 예뻐.”
“정말?”
나경의 반응을 보니 이 말이 좀 먹히는 것 같았다. 정우는 계속 그 분위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네 웃는 모습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야.”
“피. 거짓말.”
나경이 눈물 고인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눈물들을 훔쳐냈다.
정우는 이 타이밍에 나경의 손을 잡고 싶은 욕망과 맞서 싸웠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이때 그를 그 가망 없는 싸움에서 구원해 줄 인물이 나타났다. 정우는 얼른 손을 들어 이 구원자를 맞이했다.
“아. 진이! 왔어?”
“늦어서, 미안.”
성진이 멋쩍은 얼굴로 나경을 슬쩍 본 뒤 병상으로 다가왔다.
“미안하긴 뭘. 네가 빨리 경찰들 안 몰고 왔으면 내가 있을 자리가 여기가 아니라 영안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넌 내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 참 오석이는?”
“오석이는 멀쩡해. 너처럼 치고 박은 게 아니라 한 방에 뻗은 거라 눈 두덩이에 멍 좀 든 거 외엔 별 탈 없어. 그런데 너, 소개 안 시켜주냐? 이런 미인을 혼자 알고 있으려고?”
“아 참, 그렇지. 나경아. 여긴 어제부터 알게 된 성진이라는 친구야. 독일에서 전학 왔어. 그리고, 진. 여긴 중학교 동창이고 같은 성당 다니는 최나경이야.”
“안녕.”
“안녕. 나, 좀 나갔다 올 게. 얘기 하고 있어.”
나경이 어색한 얼굴 혹은 억울한 얼굴을 하고 병실에서 나갔다.
“저, 저기. 그냥 있어도 되는데, 쩝.”
성진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씨익 웃었다. 그 바람에 얼굴에 비해 유난히 큰 코가 더욱 우스워 보였다. 그 우스운 코를 흔들며 성진이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표정을 짓더니 한마디 던졌다.
“그나저나 디누, 너 싸움 엄청 잘하더라? 앞으로 네 앞에서 말조심 해야지.”
“그래? 그럼 내가 뭐 하나 물어 볼 테니까 대답 잘 해. 대답이 영 성에 안 차면 내 싸움 실력을 다시 보여줄 테니.”
“이거 원, 무서워서라도 대답 잘 해야겠다?”
“내내 그 불량배 놈들 생각했어. 그 놈들 보니까 우리 또래였어. 너무 어리잖아? 설마 놈들이 스스로 그런 인생 살자고 작정하진 않았을 건데. 국민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귀엽고 순진한 어린이였을 거잖아? 그런데 어째서 겨우 십 년 만에 우리와 그 녀석들이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까? 거기서 다시 십 년이 지나면 또 얼마나 다른 삶을 살게 될까? 당연히 그 놈들의 삶은 안 봐도 뻔하잖아? 그 바닥, 그 막장. 이런 생각 하니까 그 녀석들이 막 불쌍해지더라고. 물론 그러다 내 몸에 처 감은 붕대를 보면 다시 용서가 안되고. 자,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불쌍해 할까, 용서하지 말까?”
“불쌍하게 봐서 용서해.”
“용서해? 나 지금 아파 죽겠는데?”
“그 놈들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쁜 세상이 그 놈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봐. 그런 녀석들 마음 한 꺼풀 아래는 온통 상처 투성이일 거야. 잘못된 가정, 부모의 학대, 어른들의 무관심, 빈곤, 지저분한 주위환경 등등. 나도 너도 그런 환경에 처했다면 그런 놈들이 안될 거라 장담 못하거든.”
“그러니 잘못된 세상에 맞설 일이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렇지.”
“세상이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는데?”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돈으로 환산하지 않아야 할 것 까지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 선의도 돈으로 바뀌지 않으면 비웃음거리가 되고, 불의도 돈을 벌어들인다면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세상. 하긴 너흰 아무것도 모를 거야. 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 이 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 자들과 빌붙어 있는 것들이 어떤 무리들인지. 어른들이 무엇을 알고도 모른 척 하고 있는지.”
“아니, 나도 대충 알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은 있거든. 광주 사태도 뭔가 감춰지고 있다는 것 짐작하고 있고. 네 말 대로 뉴스나 신문은 못 믿겠어. 진이 넌 독일에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겠지?”
진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일단 알고 나면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일단 알고 나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으니까. 이 끔찍한 나라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큰 죄를 짓는 것 같으니까.”
그 모습을 본 정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 난 무엇을 할까? 숨만 쉬어도 죄라니, 너무 무섭잖아? 그럼 뭐라도 해야 하잖아?”
“너는 예술가잖아? 사람들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어. 그럼 세상도 좋아질 거야.”
진이 호소하듯 꿈꾸듯 말했지만 ;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은 커녕 날 구하지도 못할 예술. 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 아녜스도, 누나도, 그리고 나도, 결국은 어떻게 되었지? 다 루저들이잖아?”
“아직 속단하긴 일러.”
“지네트라면 혹시 몰라. 그래 그런 엄청난 일은 지네트더러 하라 하자. 한 물간 디누는 그냥 세속적으로 살고,”
“지네트.”
“그래. 지네트.”
“아니, 저저저 저기, 지네트.”
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정말 지네트가 나타났다.
정우가 피식 웃었다.
“왜 그리 놀라냐? 너 답지 않게?”
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기 진짜 지네트야? 설마?”
“설마가 아니라 현실이야. 너 땡잡았다. 팬이라면서?”
순간 지네트의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해! 너무 많이 다쳤어!”
지네트가 바로 앞에 나타나자 진은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고 정우는 그저 드러누운 체 빙긋이 웃기만 했다.
“드레싱을 과하게 해서 시각 효과가 그럴 뿐이야. 보기 보다 훨씬 괜찮아.”
“어디 좀 봐.”
지네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정우의 두 손을 잡더니 가볍게 몇 번 주물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애무?”
“별 거 아니야. 확인 좀 하게.”
“무슨 확인? 칼침은 맞았지만 손가락은 안 잘렸어.”
“그러게. 손가락은 멀쩡하네. 무사해서 다행이야. 다 나으면 우리 집에 놀러 와. 소리 한 번 맞춰 보게.”
“가능하면 빨리 일어날게.”
“그럼 그때 보자.”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지네트가 언제 왔냐 싶게 사라졌다.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던 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병문안 온 게 아니라 손가락 보러 온 거였어.”
“그것도 일종의 병문안이긴 하지. 지네트한테 중요한 건 내 몸통이 아니라 손가락이니까.”
“그것 참. 예술가들의 세계는 잔혹하구만.”
“그럼. 잔혹하지. 상상 이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