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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Aug 07. 2020

시차

20대 암환자의 여행_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_스페인 마드리드

‘약 먹었어요. 걱정 말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내 나이 스물 하고도 아홉 살. 엄마는 스물여섯에 나를 낳으셨으니 너무 어린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일과는 언제나 엄마에게 약을 먹었음을 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꼭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몸이 아프기 전에는 여행의 장애물이 주로 돈과 시간이었다. 몸이 아프고부터는 여기에 치료 스케줄이 더해졌다. 4주에 한 번 주사를 맞고, 매일 같은 시간에 약을 먹는다. 그런데 시차가 나는 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이런 경우 24시간을 계산해서 먹어야 할까? 아니면 현지 시각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먹던 시간에 먹어야 할까?

항 호르몬제 타목시펜 : 유방암 치료후 관리의 일환으로 매일 같은 시간에 먹는 약. 5~10년 복용이 일반적이다.

 병원에서는 현지시간 기준으로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시차를 계산하기엔 번거로우니까’로 단순했기 때문에, 최대한 기존의 복약 시간을 유지하기로 했다. 나는 한국에서 오전 9시 30분에 약을 먹는다. 그래서 8시간의 시차가 나는 스페인에서는 새벽 1시 30분에 먹어야 했다.

 엄마는 약을 먹는 부분에서만큼은 나를 완전히 믿지 않으셨다. 딱 한 번이지만 내가 약을 깜빡하는 것을 목격하셨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든지 한국시간 9시 반에 무조건 집에서 연락이 온다. 스페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약 먹을 시간이야’로 시작된 통화는, 서로에게 ‘잘 자!’와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말하며 끝난다. 내가 하루를 마무리할 때 엄마의 하루는 시작된다. 갑자기 우리의 시간이 정 반대가 되는 느낌이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호세와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은 지금 아침밥 먹을 시간이야.”

오, 정말 신기하다.”

“그렇지. 시차가 무려 8시간이나 나거든.”

그렇구나. 너 혹시 베이징 타임이라고 들어봤어?”

아니. 들어본 적 없어. 그게 뭔데?”

중국에는 시차가 없다는 말 같아. 나도 잘 모르지만.”

 

 호세는 아시아인인 내가 자신보다 잘 알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내 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베이징 타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결국 서로 중국에 가본 적 있냐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다가 방에 돌아왔다.

 


 베이징 타임은, 동일 시간권에 대한 구분 없이 ‘베이징의 시각을 기준’으로 중국 전역의 시간을 통일한 것을 부르는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중국은 총 5개의 시간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설되며 민족 통합의 이유로 전역의 시간을 표준 시간으로 통일한 것이라나. 그래서 중국에는 시차가 없다.

 

국토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베이징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하니, 똑같은 시간이라고 해도 똑같다고 말할 수가 없다. 실제로 베이징과 경도 차이가 크게 나는 지역들은 자체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새 새벽 1시 30분이 다 되었다. 전화가 울린다.

 지금 엄마의 시간은 오전 9시 30분이겠지.

 

 약을 한 알 입에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가끔은 세상이 시차를 인정하지 않는 베이징 타임 같다고. 각자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20대에는 취업을 해야 하고, 30대에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말이다. 이러한 ‘평범한 마음의 안정’을 담보로 한 사회적 시간의 흐름은, 역설적이게도 조금이라도 어긋난 순간 커다란 마음의 부담을 안겨준다.


 시차는 분명 존재한다. 스페인과 서울이 여덟 시간 차이 나는 것처럼, 중국 전역의 똑같은 시간이 실제로는 똑같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나에게는 나의 시간이 있다. 사회의 베이징 타임에 나를 맞추느라 애쓰지 않고 묵묵히 나만의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 세상과 얼마간의 시차가 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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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 에세이 출판 일기도 연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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