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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Jul 28. 2020

엄마와 토마토

20대 유방암 환자의 여행과 삶_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

 내가 '엄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은 토마토를 끓이고 있는 모습이다. 약간 구부정한 등 너머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새콤한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 날, 아침을 먹으며 볼 생각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상기된 목소리로 ‘암을 이기는 음식은 토마토입니다!’라며, 토마토의 효능을 설명했다. 확실히, 토마토에 들어있는 리코펜이 항산화에 좋은 것은 사실이다.

 

토마토를 먹기 시작한 것은 그날 저녁부터였다. 나는 토마토를 자주 먹으면 좋지만, 굳이 매일 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종교에 심취한 것처럼 토마토를 끓였다. 실제로 정성스럽게 끓여낸 토마토의 새빨간 빛은 퍽 먹음직스럽다. 그러나 맛은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그 특유의 풋내가 싫었다. 그러나 엄마는 매일 내게 토마토를 먹였고, 혹시라도 빼먹은 날엔 불같이 화를 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주스처럼 마셨지만 3년이 지나자 나의 입맛도 한계에 부딪혔다.

언제 어디서나 빠지지않는 토마토

엄마가 만들어준 토마토 병조림이 짐처럼 느껴졌던 순간도 많았다. 정신없이 베트남 남부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엄마가 유리병들을 캐리어에 억지로 욱여넣고 있었다. 캐리어가 닫히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나는 짜증을 버럭 내며 절반을 덜어냈다. 그리고 화장품 파우치를 넣느라 하나 더 뺐다.

“거기도 토마토 정도는 있겠지!”


캐리어를 끌자 덜그럭. 덜그럭하고 유리병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가 여행 내내 귀에 거슬렸다.

 


 

베트남 무이네의 사막은 사막보다는 사구에 가까웠다. 일몰까지 기다릴 심산으로 모래언덕에 앉아있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대는 탓에 자꾸만 모래가 날렸다. 까끌까끌한 모래가 입안을 굴러다녔다. 모래를 퉤, 퉤, 거리면서 뱉고 있자니, 아래에서 사람이 몇 명 올라오는 것이 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가족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만약 우리 가족이 여기 함께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환갑이 멀지 않았는데도 장난기 넘치는 아빠는 모래 썰매를 신나게 타실 것 같다. 어쩌면 타고난 친화력으로 베트남인 친구를 열 명은 사귀었을지도 모르겠다. 호리호리하고 피부가 뽀얀 언니는 파스텔 톤의 아오자이가 예쁘게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즐거운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독 한 사람. 엄마만큼은 웃는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막에서 토마토를 구하지 못해 울상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가족을 생각하며 떠올린 모습이 웃는 얼굴도 아니고 다정한 목소리도 아니고 고작 토마토 따위를 구하지 못해서 울상인 얼굴이라니. 문득 캐리어에서 토마토를 빼버린 것이 생각났다. 엄마의 토마토는 그냥 토마토가 아니었다. 빨갛고 부드럽고 따뜻한,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한없이 미안했다. 여행을 앞두고 내 머릿속에는 내내 여행지에서 생길 새로운 에피소드 따위로 가득했다. 내 걱정뿐인 엄마의 마음은 토마토 병조림처럼 내버려 뒀다. 무이네가 자랑하는 붉은 모래언덕에서 빨갛게 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것은 2주 만이었다. 엄마는 내가 집을 떠날 때와 같은 모습으로 토마토를 끓이고 있었다.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모습이다.


냉장고 안에 오늘 먹을 건 있어.”

 역시. 오늘치 토마토 병조림이 냉장고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잘 밀봉된 유리병을 열고, 차가운 상태로 한 모금 들이켰다. 3년째 한결같은 새콤하고 씁쓸한 맛이다. 토마토 병조림은 살짝 데친 토마토 껍질을 벗기고, 자른다. 그리고 다진 양파와 마늘을 넣고 끓인다. 그것을 한 번 더 갈아서 흐물흐물해지면 소독한 병에 채워 밀봉해서 만든다. 생각만 해도 번거로운 과정이다. 이유식처럼 건더기가 굵고 입자가 고르지도 않다. 마시고 나면 병 바닥에 잔여물 같은 것이 남는다. 재료들을 넣고 한 번에 갈아버렸다면 만들기도, 먹기도 편했을 텐데 마치 요령 없는 엄마 같다. 숟가락으로 남은 병조림을 싹싹 긁어서 말끔하게 떠먹었다.

 


딸 배고파? 오늘은 웬일로 토마토를 이렇게 맛있게 먹어?”

사막에서 못 먹은 것 다 먹으려고요”

 싱겁긴. 하고 엄마는 토마토 냄비를 유리병에 옮기기 시작했다. 새콤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진다.

 

 여전히 나는 토마토를 먹어서 암이 낫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마토 병조림은 가장 완벽한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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