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은 휘날리고.
안녕, 당신. 오랜만이에요.
어째 오랜만이라는 인사만 줄창 하는 것 같아 부끄럽네요. 하지만 들어보세요. 저도 정말 바빴답니다
작년 후반부터 저에겐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정말 많은 일인지는 생각해봐야겠지만 체감상으론 그렇습니다. 무슨 이야기부터 하면 좋을까요...
그래요. 일단은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지요. 제가 간만에 그리운 마음의 고향을 찾은 이야기.
마음의 고향이라 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그냥 묻어둔 취미 생활의 먼지를 털었다는 이야기여요. 맞아요. 저번에 쓴 인형놀이 말이에요. 별 거 아니죠? 하지만 그게 제게는 보통 일이 아니랍니다. 저는 그것 덕분에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때는 2015년 7월의 일입니다. 교복을 입고 한층 파릇하게 자라나야하던 나이의 저는 당시 상당히 쇄약한 상태였어요.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몸 건강이 아닌 마음의 건강 이야기지만요.
이전에 말한 적이 있지만 저는 정신질환자입니다. 아마도 소아 우울증이었을 거고, 기분 장애를 가지고 있고, 주의력 결핍 증상이 있어요. 그 정도로 무슨 병이냐! 라고 할 정도로 애매한 증상들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여 인생이 참 힘들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잠에 들면 깨어나지 못 했고, 당장 오늘의 할 일을 기억하고 정리하지 못 했습니다. 시험 날짜도 기억하지 못 하고 당장 내일 가져와야하는 교과서도 기억하지 못 했어요. 공부 머리를 타고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오래 고통 받은지도 모르지만요.
엉망진창으로 지내는 저를 살린 건 늘 옆에서 챙겨주던 상냥한 친구들과 맑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인형이었습니다.
당시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고마울 따름이에요. 시험 기간은 물론 무슨 숙제가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를 챙겨서 그럭저럭 멀쩡한 한 명의 학생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줬거든요. 성인이 된 뒤에도 한두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사는 세계가 많이 달라졌단 생각에 인연을 단단히 해두지 못 해서 아쉽습니다. 지금 만났으면 그것조차 반갑게 여겨졌을텐데 말예요.
인형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의 제게 평화란 인형과 눈을 맞추고 있는 순간과 잠들어있는 때 뿐이었단 거예요. 그 외의 모든 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십 년 이상 15년을 가장 행복한 시기로 기억한 건 모두 그 때 만난 인형의 눈빛이 저를 치유했기 때문이에요.
그때 그 인형의 이름은 루시안이라고 해요. 선한 초록색 눈이 특징적인 제 사랑입니다. 부모님과의 불화로 결국 보내주고서 결국 못 잊어 다시 데려온 제 왕자님. 언젠가는 이 아이의 이야기도 길게 할 기회가 있겠지요.
시안이는 구체관절인형이라고들 부르는 종류의 인형입니다. 레진으로 만들어서 사람이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얼굴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눈색과 머리색을 골라 세팅하고 옷도 갈아입힐 수 있는 굉장히 손이 많이 가고 돈이 많이 드는 고급 인형이에요.
이런 고급 인형을 아직 수입도 없던 제가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건 물론 부모님 덕분입니다. 인형을 꾸미는 건 용돈으로 어찌저찌 해낼 수 있을지 몰라도 사는 건 부모님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아예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용돈을 끌어모아 그만큼의 금액을 만들어낼만큼 인내심이 좋지 못 하거든요.
시험 점수 몇 점 이상이면 사주겠다고 했었어요. 공부를 조금만 열심히 하면 낼 수 있는 점수였다고 부모님은 생각했던 거 같아요. 당시에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점수는 미달이었고, 그럼에도 부모님이 인형 살 돈을 지원해주셨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중고 장터에서 구매한 인형이었어요. 인형은 비싼 취미인 만큼 중고 장터가 활성화되어 있거든요.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아니었고 당시 인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생긴 인터넷 인연 중에 한 분이 찾아주셨습니다. 예상치 못 한 만남이었고, 적당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만남은 제게 충격적일만큼 중요했어요.
시안이와의 첫 만남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택배가 도착했단 소식에 언덕(하교길이 오르막이었거든요)을 급하게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이조차 맞는 기억인지 모르겠어요. 7월이면 한창 여름인데 그 부분도 잘 기억나지 않고...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있을텐데 찾기도 여의치 않고 왠지 찾지 않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네요.
사람 마음이 간사해요. 이렇게 쓰다보니 뭔가 기억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 기억나는 그 날의 더위와 하복이 정말 그 날의 것이 맞을까요.
여기까지 쓰는 사이, 벌써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어요.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해요, 사랑하는 당신.
2025년 02월 23일 일요일.
날선 바람에 몸을 떨며, 그래도 즐거운 만남에 기대를 감추지 못 하는 당신의 속삭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