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기억하나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저는 오늘도 버스 안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날이에요. 날은 여전히 쌀쌀합니다. 이달 말부터는 따뜻해진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더위를 많이 타는 제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추위를 타는 사람에게는 무척 괴로울 것 같습니다.
저번에는 인형 이야기를 했지요.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오늘은 당신도 즐거워할만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요. 본디 저는 재미 없는 사람이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형 이야기를 했으니만큼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어린 시절이래도 교복을 입던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꽤나 감상적인 아이였습니다. 초등학생 때 교정을 거닐면서 혼자 감상에 빠져있던 순간이 생각나네요. 소설에 푹 빠져살았으니 이상할 것도 없기는 해요. 판타지 소설에 푹 빠져 있어서 '통성명' 같은 잘 쓰지도 않는 문어적 표현을 입에 올린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알듯이 어린 시절에 감상적인 면모가 강하다는 건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기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저는 지금도 어릴 때도 사람을 참 좋아하고 외로움을 많이 탔는데 워낙에 감상적이고 독특한 면이 강한 어린이/청소년이다보니 사귈 수 있는 친구가 몹시 한정적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초등학생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안 다닐 수도 없고, 외롭기는 하니까요?
그래서 제게 친구란 사람이 아니라 책이었어요. 책 속에 있는 세상이 진짜 세상이었죠. 물론 현실에서도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건 제게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언제든 버려도 되는 가짜 세상이었어요. 제법 나이가 어릴 때부터 인터넷을 했고(당시엔 희귀한 일이었어요!) 학교나 가족보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더 소중했어요. 그 사람들은 제게 편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나이 어린 꼬마라고 귀여워해줬거든요.
그러다 만난 것이 인형입니다. 사랑하는 저의 왕자님.
루시안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무의식 중에 모티프를 따왔겠지만, 어쨌든 창작한 설정으로 아주 작은 별에서 혼자 사는 왕자님이라는 설정이었어요. 나중에 이런저런 곁가지가 붙었고요. 그때의 인형이 지금도 가장 소중한 인형입니다. 이제 제 곁에는 없고 똑같이 생긴 다른 인형이 자리를 차지한 상태긴 해도요.
왕자님이 제가 가진 첫 번째 진짜 친구였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사람보다 소중한 물건이고, 그것에 눈코입이 달려서 제 마음을 기댈 수 있게 해주는데요. 보통 애착인형은 안고 자는 솜인형인데 저는 어쩐지 그 아이가 첫번째 친구였습니다. 안고 자는 솜인형도 다들 오래오래 잘 데리고 있기는 하지만 왠지 친구로 여겨지진 않더라고요. 신기한 일이죠.
어라. 벌써 버스에서 내려야할 시간이네요. 엉뚱한 곳에서 또 끊기긴 하지만, 여기서 마쳐보겠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건강하세요.
2025년 02월 27일 목요일,
추억을 돌이키며 아련해진 당신의 속삭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