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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김무명 Mar 08. 2021

#7. 가난의 족쇄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도돌이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워 글을 쓴다. 머릿속을 정리하는 이 과정들이 나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된다.


민낯으로 써 내려가는 나의 글이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이야기를 덜거나 더하지 않는다. 넘어지고 미끄러진 삶의 기록들이 앞으로의 인생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리라고 믿는다.




첫 월급 215만 원



2016년, 그토록 바라던 취업을 했다. 합격자 발표 후 입사까지 약 한 달간의 시간이 생겼다. 나는 인생 마지막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고 약 3주 동안 건축물 측량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부모님과 며칠 쉬고 신입사원 연수를 받기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연수를 마친 후 부서 배치를 받고 정신없이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기대하던 첫 월급을 받았다. 2,155,630원, 풍족한 월급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첫 월급


다른 신입사원들처럼 보험과 적금에 가입했다. 계절에 맞는 옷을 사고 부모님의 생신을 챙겼다. 여자 친구와 외식을 하고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 학자금 대출을 갚고 결혼 자금을 모았다.


취업 후 더 이상 버스비가 없어 걸어 다닐 일도, 밥을 사 먹기 전에 일일이 통장 잔고를 확인할 일도 없었다. 힘들게 살던 지난날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달라진 삶에 만족했고 행복했다.




새로운 시작



입사 1년 후 2017년, 오랫동안 기다려준 여자 친구와 결혼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진행하는 결혼이었지만 처가댁과 여자 친구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아끼고 절약하며 지내왔지만 결혼식에는 아끼기가 어려웠다. 남부럽지 않은 결혼식을 치르고 싶다는 욕심에 예산을 초과해서 결혼식을 진행하게 됐다. 모아놓은 돈과 마이너스 대출 1,000만 원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 jeremywongweddings, 출처 Unsplash


집은 보증금 7,000만 원에 월세 70만 원짜리 아파트를 구했다. 보증금은 모두 은행에서 빌렸다. 부담스럽긴 했지만 아내와 함께 벌면 월세와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 전세 대출 7,000만 원, 결혼 자금 마이너스 통장 1,000만 원, 학자금 대출 2,000만 원. 우리 부부는 1억 원의 대출로 첫출발을 했다.


오랫동안 일했기에 건강 회복이 필요했던 아내는 결혼 후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당장 아기 계획은 없었지만, 추후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해 프리랜서로 커리어를 쌓아 나가기로 했다. 적은 돈이지만 외주를 받아 일을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한 달 수입은 약 300만 원 남짓이었다. 그중 월세 70만 원, 대출 이자 20만 원, 관리비 , 핸드폰 요금, 교통비, 식비 등 고정 지출이 빠져나가면 돈이 거의 남지 않았다.


돈이 많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비록 월세였지만 거주할 집과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다. 아내와 나의 수입도 점차 많아질 예정이었다. 


재테크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꿈을 키웠다. 부동산과 주식 공부를 시작했다. 종잣돈을 먼저 모아야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조금씩 아끼고 모아 나갔다.


맨몸으로 시작했지만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이대로만 쭉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돌이표



2018년,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도에 계신 부모님께 연락이 왔다. 동네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고 하셨다.


집이 없었던 부모님은 친구분의 비어있는 집에서 몇 년째 지내고 계셨다. 그러다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 됐고 급하게 아파트 월세를 계약했다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일부러 이사가 끝날 때까지 연락을 안 했다고 하셨다. 연락을 받고 주말에 바로 부모님 집으로 갔다.


부모님이 이사 간 집은 1984년 지어진 아파트였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의 영세민 아파트. 부모님은 보증금 500만 원조차 없어서 신용 대출을 받았다고 하셨다.


© xavi_cabrera, 출처 Unsplash


칠순의 나이에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 140만 원의 적은 월급을 받는 직장이지만 그마저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수십 년간의 노동으로 부모님은 건강도 안 좋으셨다. 짠 국물과 밥을 주로 드시다 보니 두 분 다 당뇨와 고혈압에 걸리셨다. 매달 약 값도 부모님께는 부담이었다.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시게 되면 부모님의 생계 유지조차 어려운 환경에서 월세 집을 계약할 수밖에 없는 쓰디쓴 현실에 가슴이 죄어들었다.




가난의 족쇄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내가 신용 대출을 받고 부모님이 주택 담보 대출을 받아서, 월세로 살고 계신 아파트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부모님 연세에 2년마다 이사를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았고, 최소한의 안정감은 누리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파트의 가격은 8,000만 원이었고 동네에서 그것보다 저렴한 주택은 없었다. 나의 신용 대출 3,000만 원과 부모님의 주택 담보 대출 5,000만 원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기로 했다.


나는 결혼하면서 받아놓은 신용 대출과 전세 대출이 많아서 추가 대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러 은행을 알아본 끝에 8%대 이율로 대출 3,000만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집을 계약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도 집이 생겼다. 낡고 좁은 아파트였지만 부모님 명의로 된 집이 생겼다. 부모님이 많이 미안해하시고 고마워하셨다.


얼굴은 웃었지만 마음은 울었다.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athree23, 출처 Pixabay


3,000만 원의 빚은 매월 50만 원씩 갚아도 5년이나 갚아야 하는 큰돈이었다. 거기에 8%의 대출 이율은 매달 20만 원의 이자 금액을 만들어냈다. 일단 당분간은 이자만 갚기로 했다. 이자만 갚기에도 힘에 부쳤다. 아내에게 얼굴 들기가 어려웠다.


2018년, 입사 후 1년 반 만에 나의 빚은 1억 3,000만 원으로 늘어났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졸업했고,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공기업에 취업했다. 언제나 성실히 일했고 큰 욕심 없이 현재에 감사하며 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격으로, 정직하고 예의 바르게 살려고 항상 노력했다. 명품을 사거나 외제차를 사는 등 사치하지도 않았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돈 드는 취미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점점 가난해졌다. 내가 배워온 인생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현실에서 부자는 계속 부자가 되고, 평범한 사람은 계속 평범하게 살고,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해질 확률이 높다.


가난한 사람은 사치를 하든 성실히 살든 가만히 있든 계속 가난해지기 쉽다. 현실은 지독하리만치 불공평하고 잔인하다. 가난의 족쇄는 결코 쉽게 풀리지 않는다.


© kaleyloved, 출처 Unsplash


내가 지나온 삶의 기록들은 때로는 지긋지긋하다. 가난은 애써 외면하려 해도 자꾸 내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시선은 희망을 향해있다. 넘어지고 좌절하는 이야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지만 그 이야기 속에 절망만 담겨 있지 않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록을 이어갈 것이다.


이 모든 극복의 과정들이, 나와 같은 처지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한 작은 응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 8편에서 이어집니다.


☞ #8. 단 하루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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