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제주도 여행기
때는 4개월간의 2차 환장대잔치(몸담고 있는 모 학원의 두 번째 과정)이 막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누나, S도 제주도 간다는데 누나도 갈래?”
“응! 그래!”
옆자리에 앉아있던 C와 J도, 저 멀리 앉아있던 막내도 얼떨결에 같이 가기로 했다. 사람 많은 게 싫어 엠티 한 번 진득하게 참석해본 적이 없는데 무려 여섯명이라니 (이후에 한 명 추가됐다). 말 나온 지 30분 만에 전원 항공권 구매 완료! 인생사 최다 인원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주 오늘, 뿌연 안개에 가려진 망망대해를 연상시키던 2차 환장대잔치가 끝났다. 그후 며칠간 마치 휴가를 나온 군인이라도 된 양 못 만났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는 영영 부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김포공항으로 갔다. 수면시간이 부족해 매일 좀비처럼 쩔려있던 동기들이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차림으로 나타났다. 다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놀 수 있을지 몰라!’ 벼르고 나온 것 같았다. 3박 4일 제주도에 가면서 각자 수하물을 하나씩 붙이고는 서로에게 말했다. “진짜 이 멤버로 제주도에 가게 되다니!” 인생은 역시 알 수 없다.
주로 낮에는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저녁은 모여서 먹었다. 첫째 날에는 오후 늦게 도착해 다같이 움직였다. 만원의 행복이라는 인생 맛집에서 회와 각종 생선요리를 먹고, C 아버지의 은총으로 히든클리프 호텔에서 묵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갔는데 호텔이라니. 평소라면 상상도 못 했을 호화여행이다. 인피니티 풀도 처음 가봤다. 바람도 찬데 야외풀이 웬말인가. 가운을 하나씩 걸쳐 입고 온풍기 아래 선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누워있자니 얼굴이 너무 건조해져서 따뜻한 수영장물에 몸을 담그고 몇번 왔다갔다 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저 멀리 디제이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음악을 열심히 틀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핸드폰이 곧 물에 빠질까 불안했다. ‘요즘 사람들은 수영장에서도 사진을 찍는구나.’ 시대에 뒤처진 생각을 하며 풀장을 빠져나와 선베드에 망부석같이 앉아있는 아이들과 치킨을 먹었다. 노곤한 몸으로 편의점에서 초코에몽과 훈제계란을 사 먹고 책을 몇 장 읽다가 잠이 들었다. GQ 이충걸 편집장의 <엄마는 어쩌면 그렇게>였다.
둘째 날은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였다. 일행들은 억새밭에 가겠다고 했고 나는 반나절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한담해안산책로에 내려 해안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1시간 정도 걸으면 될 거라 예상했는데, 목적지로 설정한 바다의 술책이 생각보다 멀어 2시간 남짓 걸렸다. 중간에 길이 끊겨 둑을 오르기도 했고, 본의 아니게 찻길을 걸을 땐 태양이 유독 따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좋았다. 바다가 예뻐서 좋았고, 혼자라서 좋았고, 곧 다시 만날 친구들이 있어 좋았다.
다 떨어져 가는 운동화처럼 체력이 다해갈 무렵 독립서점 바다의 술책이 나타났다. 번잡하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자리한 책방에 들어서자 각 나라 언어로 된 <어린 왕자> 책들이 진열된 서가가 보였다. 사장님이 <어린 왕자>를 좋아하시나보다. 나도 그런데.
판매하는 책들을 한참 구경하다가 너세이널 호손의 <주홍글씨>를 집어 들었다. 몇 가지 끌리는 에세이집이 있었지만 그날은 꼭 좋은 소설이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탄산수를 마시며 일행들이 억새밭과 각종 카페 투어를 마치고 올 때까지 두어 시간 책을 읽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서점은 북스테이도 겸하고 있는데 다음에 제주에 가면 며칠 머물고 싶다.)
이른 아침 비행기로 돌아왔기 때문에 셋째 날이 사실상 마지막 날이었다. 우도에 가고 싶었고 막내가 따라나섰다. 자전거를 탈까 전기차를 탈까 고민하다가 서로의 저질 체력을 감안해 전기차를 타기로 했다. 안내직원의 설명이 휘리릭 끝나고 전기차에 올랐다. ‘앞으로 나가긴 할까?’ 걱정스러운 몰골이었지만 덜덜 대면서도 잘 나갔다.
눈에 띄는 노점상에서 뿔소라를 한 접시 먹고 친구에게 추천받은 카페 블랑로쉐를 찾았다. 같이 간 막내가 들어서자마자 감탄사를 내뱉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통유리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테라스에는 팔레트를 쌓아 만든 좌석이 놓여있었는데 그 위로 베이지색 그늘막이 넘실댔다. 땅콩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유독 사람이 없어서 한적하기까지 했다. 20분 정도 앉아있었나 했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훌륭했다.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아부오름, 바다 비린내가 진동하던 풍력발전소 일대, 세화의 한 카페에 들렀다가 마지막 일정으로 다같이 달사막이라는 술집에 모였다. 제주비어에서 책맥하기 좋은 곳이라고 소개한 곳이었는데 히피 마을에나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궁금했던 제주비어는 정말로 감귤 맛이었다. 양조장을 못 가봐서 아쉬웠지만, 서울에 없는 맥주를 맛있게 한잔한 것으로 만족한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 어느덧 다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마지막 울트라환장대잔치를 알리는 문자를 받았다. 처음에는 제주도를 가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는 현실로 돌아온 게 꿈 같았다.
“아, 나가기 싫다.”
“K야, 빨리 일본 가는 표 알아봐.”
수하물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서성였다. 주춤하던 발걸음이 무색하게 각자 집으로 잘 돌아갔지만.
돌아보면 때마다 잘 어울려 지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심지어 직장에 다닐 때도. 마치 평생 함께할 것처럼 자주 얼굴을 보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어떤 계기가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남이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겪는 일이라는 걸 경험으로 아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다. 이번 여행에 함께 했던 친구들도 아마 머지않아 멀어질 거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그 역시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이토록 막무가내였던 여행을 남기려는 계획은 없었다. 그냥,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멀어져 갈 때, 오늘의 우리를 조금 더 잘 기억하고 싶어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