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출판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다 1인 출판사를 만들게 된 이야기입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유통하기까지의 시행착오를 담았습니다. 1인 출판사를 시작하시려는 분들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좋아하는 서점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에세이 책들을 살폈다. 나의 원고와 결이 비슷해 보이거나 만듦새가 마음에 드는 책은 제일 뒤 페이지를 펼쳐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수십 장이었다. 제안서를 보낼 출판사를 찾는 일이었다.
출판사에서 일했던 동료의 도움을 받아 한 장짜리 출판 제안서를 만들었다. ‘이 원고가 책으로 나와야 하는 이유’, 그러니까 나름의 기획 의도를 두어 문단 정도 썼다. 책의 주제를 나타내는 몇 문장을 원고에서 발췌해 넣었고, 앞으로의 계획도 몇 줄 적었다. 전문가들 눈에는 볼품없었을 게 분명하지만, 훌륭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누군가는 읽어주겠지 싶어 열심히 만들었다.
기울어가는 종이책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무명작가의 책을 내줄 곳이 있을까?
연락이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며 선호하는 출판사 순서대로 매일 몇 군데씩 메일을 보냈다. 계약할 출판사를 만나기까지 서른 통 조금 넘게 보냈던 것 같다. 삼 분의 이가 거절 메일을 보내왔고, 삼 분의 일은 원고를 조금 더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중 두 군데가 최종적으로 내 원고를 받아줬다. 메일을 백 통은 보내야 한 통 정도 회신을 받을 줄 알았는데, 마냥 신기했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출판사 대표님을 만나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작가님 삶을 응원해 주고 싶다’는 말이 마음을 크게 울렸다. ‘작가’라는 말을 그날 처음 들어서 더 그랬을 거다. 회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원고 작업 속도가 더뎠지만, 출판사에서는 독촉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원고를 넘기고 피드백을 받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편집이 끝났다. 내지 디자인도 나왔고 표지 디자인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해 11월에 출간되기로 했던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편집자님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고, 대표님은 몇 달째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답답했지만 다른 출판사에서 편집이 다 끝난 원고를 다시 투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법적 분쟁 소지가 있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원고가 묶인 채로 2년이 흘렀다.
이미 시의성이 많이 떨어진 원고였지만, 그래도 그 행방이 궁금해 대표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연락이 안 되면 번호를 지울 참이었는데 문자가 한 통 왔다. 출판사가 책을 낼 형편이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미리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책이 나오지 못한 아쉬움이 아니라 매끄럽지 못한 끝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집 나갔던 원고가 돌아온 날, 오랜만에 그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보았다. 출판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틈이 많아 보였다. 언젠가는 세상에 나오려다 만 이야기들을 잘 다듬어볼 날이 오겠지.
그 후로 또 2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재미있는 동네 책방도 많이 생기고, 양질의 독립 서적도 많이 나왔다. 1인 미디어 시장이 크게 성장하는 걸 보면서 ‘꼭 출판사에서 책을 내야 할까’ 의문이 들었고,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독립 출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서른두 살이 되던 해, 첫 출판이 엎어진 지 4년 만에 쓰고 싶은 책이 생겼다.
쓰고 싶은 책도 생긴 데다 회사에서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이벤트까지 발생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독립출판 수업을 등록했다. 한 달 만에 책 한 권을 완성하는 수업이었다. 평소 속성을 지양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속성이 유익해 보였다. 복잡한 인쇄 및 유통 절차를 단기간에 정확하게 배우고 싶었고, 숙련자의 도움을 받아 한 바퀴 돌려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단기 프로젝트에 적합한 소재를 찾다 보니 에콰도르 여행기가 떠올랐다. 일단은 매일 써둔 일기가 있었기 때문에 원고를 쓰는 데 부담이 덜했다. 첫 책인 만큼 내가 가진 개똥철학을 잘 담고 싶었는데, 일하면서 여행하는 디지털노마드 실험기보다 더 적합한 소재도 없었다.
3주 정도 퇴근 후 한두 시간씩 꾸준히 쓰다 보니 초고가 완성됐다. 초고를 출력해 다듬고 또다시 출력해 다듬고를 몇 차례 반복한 후 더미판 주문을 넣었다. 첫 번째 더미판은 생각했던 것보다 사이즈가 컸다.
판형을 줄이기 위해 인디자인에서 편집 작업을 다시 했다. 원고 내용을 보강하고 책날개와 표지 후가공까지 추가해 두 번째 더미판 주문을 넣었다.
B6(127mm x 188mm) / 표지 랑데뷰 네추럴 240g 단면 4도 / 내지 미색 모조 100g 양면 8도 /
면지 매직칼라 연미색 120g 앞뒤 1장씩 / 무선날개 세로형 좌철 / 부분 UV 스코틱스
한 권이라 그런지 주문한 다음 날 나왔다. 빨리 확인해보고는 싶은데 퀵으로 받자니 돈이 아까워 작업이 완료됐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인쇄소에 직접 찾으러 갔다. 크기가 작아지고 두께가 두꺼워지니 첫 번째 더미판 보다 훨씬 책다워 보였다.
인쇄 준비가 되었을 때, 크라우드 펀딩 준비를 시작했다. 제작비보다는 홍보가 목적이었다. 펀딩을 받지 않아도 내려던 책이었으니까. 그래서 목표 금액도 욕심내지 않고 100만 원으로 잡았다.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 프로젝트를 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의 프로젝트를 참고해 리워드를 정하고 이미지를 만들고 소개 글을 적었다. 영상과 이미지에 많은 공을 들인 듯한 페이지도 종종 보였는데,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크라우드 펀딩을 한 번 해보는 것에 의의를 뒀고, 다음 프로젝트에 참고할 팁들을 얻은 것에 만족하고 넘어갔다.
► 텀블벅 실제 링크 (www.tumblbug.com/leaveorstay)
펀딩을 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나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에게 ‘저 아이가 드디어 뭐라도 한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거였다. 혼자 꼼지락대는 것 같긴 한데 도통 뭘 하겠다는 건지 답답했을 가족들에게, ‘네가 계속 글을 쓰면 좋겠다’며 뚜렷한 결과물 하나 없는 나를 수년간 응원해 준 사람들에게, 실체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10년을 꼼지락댄 끝에 기어이 나의 것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참을 주뼛거리다 겨우 한발 내디뎠다고,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가보겠다고, 그러니까 지켜봐 달라고, 이전보다 아주 조금 덜 뻔한 이야기들을 그렇게 조잘거렸다. 뻔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런 종류의 말들이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화려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소소한 시작이라 마음에 들었다.
국회 도서관에 책을 넣거나 대형 서점과 유통하려면 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에만 부여되는 ISBN이 필요했다. 독립 서점을 중심으로 유통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ISBN만을 위해 출판사를 꼭 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어차피 해보는 거 다 해보자!
기왕 하는 거 출판사 신고도 사업자 등록도 대형 서점 유통도 다 해보기로 했다. 나는 지금 배우는 중이니까.
유통을 위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펀딩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씩 지워나갔다. 펀딩에 성공한다면, 후원자 배송 일주일 후부터 유통하는 게 목표였다. 출판사 이름은 돌고래 별자리의 공식 명칭인 ‘델피누스’로 정했다. 라틴어로 돌고래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출판사/인쇄사 검색 시스템(http://book.mcst.go.kr/html/main.php)에 들어가면 현재 영업 중인 출판사들을 검색할 수 있다. 전국 기준 출판사 상호 중 ‘델피누스’가 있는지 검색했는데 다행히 아직 없었다.
“출판사 신고하고 싶은데요. 내일 방문해도 되나요?”
“네. 근무시간 아무 때나 오세요.”
신분증과 주민등록등본을 들고 강남구청 문화체육과를 찾았다.
“출판사 신고하러 왔는데요.”
담당자에게 받은 출판사 신고 서류에 미리 정한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신고증이 발급되면 문자를 보내준다고 했다. 3일 정도 지나자 신고증을 찾아가라며 문자가 왔다. 푹푹 찌던 어느 날, 다시 구청에 갔다. 면허세 27,000원을 납부하고 1층으로 내려가 출판사 신고증을 찾았다. 수많은 체크리스트 중 겨우 하나 했을 뿐인데 양질의 책을 열 권은 낸 것처럼 뿌듯했다.
사업자 등록을 하기 위해 출판사 신고증을 챙겨 세무서에 들렀다. 사업자 등록은 출판사 신고보다 더 쉬웠다. 뭔가가 잘못되지 않는 이상 신생 출판사가 한 권의 책을 내는 전 과정에서 난이도가 가장 낮은 일이다. 농담이 아니라 창구에서 신청서를 제출하고 사업자 등록증이 나오기까지 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사업자 내기가 쉬운 나라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렇게 1인 출판사의 대표이자 대한민국 면세 사업자가 되었다. 출판사도 나고 작가도 나고, 혼자 북치고 장구 칠 채비를 마쳤다.
책을 팔고 10원이라도 받으려면 사업자 통장이 필요했다. 은행 문 여는 시간에 맞춰 회사 근처 기업은행에 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사업자 통장 만들고 싶어서요."
"이쪽에 좀 앉아서 기다리세요."
일반 창구보다 안쪽에 위치한 기업인 창구로 안내받았다. '그래. 1인 기업도 기업이지.' 나보다 부지런한 어느 사장님의 용무가 해결될 때까지 겸연쩍게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내 순서가 되었다.
"사장님, 출판사 내신 거예요?"
통장을 개설하는 내내 은행에서 자꾸 나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혼자서 책을 만들었는데 대형 서점에 유통하려니 사업자가 필요해서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형식적으로 건넨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아서 "네" 하고 말았다.
최대 난관은 공인인증서 발급이었다. 스무 살 이후로 지금 다니는 회사에 오기 전까지 윈도우 컴퓨터를 써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한국 인터넷 뱅킹과 먼 삶을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10년 전 맥에서는 인터넷 뱅킹이 불가능했다. 보안을 위한 수많은 필수 플러그인들을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딱히 공인인증서도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iOS 운영체제에서도 해당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게 껄끄러워 이체할 일이 생기면 ATM 기기에서 했다. 모바일 공인인증서 및 생체 인식 로그인이 가능해지면서 컴퓨터에서 은행 업무로 씨름할 일은 아예 없어졌다. 그랬는데, 갑자기 컴퓨터 웹 브라우저에서 사업자 공인인증서를 받아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막막한 마음으로 은행 홈페이지 공인인증센터에 들어갔다가 고민에 빠졌다. 공인인증서 종류가 세 가지나 있었다. 4,400원짜리 두 개와 110,000원짜리 한 개. 4,400원짜리 중 하나는 은행용이고 다른 하나는 국세청용이었다. 반면 110,000원짜리는 모든 전자거래가 가능한 범용이었다.
홈페이지에 있는 설명만으로는 어떤 게 나한테 필요한 건지 판단이 안 서서 이런 쪽에 빠삭한 친구에게 물어봤다.
"전자상거래 할 거 아니면 싼 걸로 해도 돼."
네이버 스토어 같은 곳에서 책이나 관련 상품을 팔 게 아니면 굳이 범용으로 발급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인터넷 뱅킹과 국세청 업무는 필요했기 때문에 4,400원짜리 두 개를 발급받았다. 이로써 유통에 필요한 사무적인 준비를 모두 마쳤다.
ISBN은 국제표준도서번호로 전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책들의 고유번호라고 할 수 있다. 이 번호를 받고 싶어서 출판사도 만들고 사업자도 내고 사업자 통장도 만든 거였다. 하루면 뚝딱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http://seoji.nl.go.kr/index.do)에 들어가 회원가입을 하는 것까지는 쉬웠다. ISBN을 신청하기 전에 발행자 번호를 신청해야 했는데, 이게 업무 기준일로 3일 정도 걸린다고 나와있었다. ‘게으름 피우다 막판에 했으면 인쇄 일정을 못 맞췄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니 아찔했다. 딱히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첫 단추부터 밀려 끼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출판사 신고증 스캔본 외에 따로 필요한 제출서류가 없어 다행이었다. 신청 후 이틀 정도 지나자 발행자번호가 발급됐다. 965648 이었다. 앞으로 내가 낼 책의 모든 ISBN에는 ‘11(한국) - 965648(발행자번호)’ 가 붙게 된다.
발행자번호가 발급된 걸 확인하자마자 ISBN을 신청하려 해당 페이지를 열었다. 이번엔 부가기호가 문제였다. 홈페이지에 안내된 도서 분류를 살펴봤지만 뭘 선택해야 할지 막막했다. 결국 관련 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ISBN을 신청하고 싶은데 부가 기호를 뭘로 해야 할까요?”
“책 장르가 어떻게 되나요?”
“에세이에요.”
담당자는 몇 가지를 더 물어보더니 03810 (교양 > 일반 단행본 > 한국문학)으로 하면 된다고 했다.
책 제목, 저자 사항, 판 사항, 도서 형태, 가격, 발행일 등을 입력하고 표지 이미지 파일도 업로드했다. 저자 소개와 도서 요약 등 추가 내용은 별도의 정정 신청 없이 자체 수정할 수 있다고 해서 일단은 필수 정보만 채워 넣었다. 이것도 발급받는 데 하루가 걸렸다. (추가 내용은 이후에 작성했는데, 해당 내용이 네이버 책에 반영되었다.)
ISBN이 발급되고 바코드를 다운로드해 책 뒤표지에 얹혔다.
'귀퉁이에 자리한 바코드를 받으려고 이 많은 걸 했구나.' 새삼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전화드린 델피누스입니다.
견적에 필요한 책 사양은 아래와 같습니다.
- 500부 / 판형: 127*188 / 188page / 날개 있음 / 면지: 앞뒤 한 장씩, 밍크지 미색 / 표지: 랑데뷰 네추럴 240g, 단면 4도, 무광 코팅 / 내지: 미색 모조 100g 양면 8도
- 표지 에폭시 후가공 유/무에 따라 두 가지 견적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회신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쇄소와 배본사를 찾기 위해 몇 군데 견적을 의뢰했다. 인쇄는 그렇다 치고 배본사가 생각보다 비쌌다. 집에 책을 쌓아 놓고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택배 작업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회사 생활과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물류 창고가 아닌 집에서 책 재고를 잘 관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발품을 팔아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배본사를 찾았다는 독립출판 수업 선생님 말이 떠올라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쇄소랑 배본사를 찾고 있는데 혹시 선생님 거래하시는 곳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선생님의 도움으로 직접 알아본 업체들보다 저렴하고 믿을만한 인쇄소와 배본사를 찾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까지 챙겨주기가 쉽지 않은데, 바로 알아봐 주시고 도와주셔서 시간도 많이 아끼고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책을 디자인할 때 에콰도르 국기의 세 가지 색상 - 빨강, 노랑, 파랑 -을 차용했다. 책 내용을 바탕으로 이어질 그래픽 작업에도 일관되게 사용될 색상들이었기 때문에 ‘인쇄에서 모니터와 너무 다르게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색이 제대로 안 나올까 봐 걱정하는 듯하자 인쇄소에서는 본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샘플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테스트를 위해 빈 페이지에 색상 칩을 조금씩 달리한 사각형 여러 개를 얹어 샘플 인쇄를 의뢰했다. 처음에 잡았던 색상이 마음에 들었고, 책에 넣은 사진들도 우려했던 것보다는 밝게 나왔다.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사이 크라우드 펀딩도 마감되었다. 감사하게도 목표 금액보다 200% 조금 넘게 달성되었다. 인쇄하고 배송하기에 충분한 비용이었다.
날으는돌고래의 첫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응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후원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고 최종 인쇄 파일을 완성했다. 첫 책 500부는 일주일 정도 후에 파주에 있는 물류 창고로 배송될 예정이었다.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되는 동안 굿즈 제작도 병렬로 이뤄졌다. 제작이 필요한 굿즈는 핀 버튼, 스티커 팩, 미니 노트 세 가지였다. 핀 버튼은 샘플 제작이 불가능했지만 이전에 한번 제작해본 적이 있어 걱정 없이 주문을 넣었고, 스티커 팩과 미니 노트는 최소 수량만 샘플을 먼저 받아봤다. 노트와 스티커의 색이 너무 다르지는 않은지, 여러 개의 스티커 중 색이 튀는 건 없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사장님, 택배 배송을 하려고 하는데 창고에서 포장 작업을 좀 해도 될까요?”
“그럼요. 와서 하세요.”
후원자들에게 약속한 배송일 하루 전날, 직접 수령한 굿즈를 챙겨 친구와 함께 창고를 찾았다.
“책 포장해 본 적 있어요?”
딱 봐도 안 해본 것 같았나 보다. 직원 중 한 분이 포장재와 문구류를 챙겨 주시며 시범을 보여주셨다. 창고에 도착해있던 책 중 100권을 찾아 자리를 잡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실전에 돌입했다.
박스 모양을 잡고, 수량에 맞게 굿즈와 책을 챙기고, 안전봉투 안에 넣고, 박스를 봉하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송장 작업까지 끝내고 나니 거의 퇴근 시간이었다. 가지런히 쌓인 택배 박스들을 보고 있으니 ‘진짜 책을 만들긴 했구나’ 싶어 뿌듯했다.
창고에는 직원분들이 밀리의 서재 배송분을 바쁘게 포장하고 계셨다. 몰랐는데 텀블벅의 경우에도 후원자 리스트와 리워드 구성 내역을 드리면 그에 맞게 포장부터 배송까지 다 해주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또 크라우드 펀딩을 하게 된다면 여전히 직접 포장할 것 같다. 후원해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서. 그 무렵 회사가 갑자기 너무 바빠져 후원자들에게 쪽지를 남기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에는 한 줄씩이라도 꼭 써야지.
정식으로 출판이 된 책을 출판사에서 무상으로 여기저기 뿌리는 게 불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증정 도장을 제작했다. 서점 계약 과정에서 견본을 제출해야 할 때, 혹은 이번 책 말고 다른 무언가를 마케팅 용도로 제공할 때 찍을 목적이었다. 다른 출판사들은 어떻게 만들었나 예시를 찾아봤는데 대부분이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길어 보였다. 비매품 세 글자가 전부인 도장도 있었다.
문구를 고민하다가 받는 사람이 순간적으로라도 빙그레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 ‘Nice to meet you’라고 적었다. 평생을 일면식도 없이 살다가 창작물을 통해 만나게 된 이들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유통에는 챙길 것들이 많았다. 신규 출판사 등록을 위해 각종 계약서에 날인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빈칸에 사업자 번호를 하도 여러 번 적어 외울 지경이었다. 모든 서점에 사업자 등록증 사본, 인감 증명서, 통장 사본, 계약서가 필요했다. 금세 서류가 한 뭉치였다. 공급률은 60~65%로 했다(공급률이 65%라는 말은 정가 10,000원짜리 책을 서점에는 6,500원에 공급한다는 뜻이다).
인터파크, YES24, 알라딘은 우편으로 계약했다. 계약이 체결되자 협력사 네트워크 접속 방법, 정산 방법, 신간 등록에 대한 안내 메일이 왔다. 신간 등록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보도자료, 미리 보기, 상세 이미지가 필요했다. 보도자료와 상세 이미지는 한 번 만들어서 계속 쓰면 되는 반면, 미리 보기는 서점마다 요구하는 사이즈들이 조금씩 달라 같은 작업을 여러 번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교보문고도 우편 접수가 가능했지만, 파주 사옥이 궁금해 직접 방문했다. 신규 출판사 계약에 필요한 서류, 보도자료, 증정 도장을 찍은 견본을 챙겼다. 신규 출판사에게는 다음 책 출간 예정을 물어본다고 해서 출간 계획서도 준비해 갔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사무실을 둘러봤다. 책더미에 파묻힌 책상들을 보면서 ‘이렇게 쏟아지는 책들 사이에서 내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문하다가, ‘사람들을 안아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계약은 순식간에 끝났다. 에세이 파트 담당 MD가 부재중이라고 해서 계약 담당자에게 신간 관련 자료들을 전달하고 초도 물량도 받았다. 서가에 꽂히게 될 테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서점에 들러 주문을 하면 찾아갈 수 있게 된 것으로 만족했다.
일어나는데 담당자가 말했다.
“책이 예쁘네요.”
매일 수많은 책을 접하는 사람이 해준 칭찬이라 그런지 빈말이었어도 기분이 좋았다.
“감사합니다.”
다음 책은 더 예쁘게 만들어서 올게요.
책은 신기하게도 야금야금 팔렸다. 아침에 주문이 들어왔다는 문자를 받으면 이메일 받은 편지함에 들어가 주문서를 확인하고 배본사 전산 시스템에 거래 정보를 입력했다. 거래처, 수량, 공급률에 따른 단가를 적어 전송하면 배본사에서 해당 거래처로 책을 보내줬다. 배본사와 계약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혼자 다 하려고 했으면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을 테다.
시장에 책을 내놓고 나니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책에 대한 좋고 싫은 감상보다는 나의 문장들이 독자에게 얼마나 오롯이 가닿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 다르기 때문에 왜곡의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해 사기 좋은 문체는 아니길 바랐다.
독서 리뷰 카페를 통해 서평단을 모집했다. 이벤트 기간이 끝나고, 개인 블로그에 올라온 서평단의 서평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책에 밑줄 친 사진을 올려주신 분들도 있었다. 부족한 문장이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된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뻔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지금 내 삶을 함께 점검해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당장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용기를 주는 책입니다."
"완독 후 느낌은 디지털노마드쪽 서적보다는 그냥 개인 여행 에세이 쪽에 가까운 걸 느꼈네요."
"디지털노마드의 삶이 더 궁금했다. 하지만 책에서는 3주간 체험한 내용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가 쓴 책은 디지털노마드에 대한 전문서가 아닌 에세이집이었기 때문에 정보서를 기대하고 읽으면 실망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는 피드백도 괜찮았다. 오히려 의도가 오해 없이 전달된 것 같아 안심이 됐다.
북 트레일러도 만들었다. 책 표지를 장식한 그네의 스윙을 모티브로 삼았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영상이 아니었는데도 오랜만에 만들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구성을 짜고 레퍼런스들을 찾고 여차저차 1차 본을 만들었다.
피드백을 받고 싶은 마음에 영상 업계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부탁했는데, ‘이런 거 잘 봐줄 사람 안다'라며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줬다. 그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결과물에 성심성의껏 피드백을 줬다. 보통 사람이라면 작업물이 별로여도 '괜찮은 것 같아요' 넘겼을 텐데, 어느 부분을 어떤 방향으로 보완했으면 좋겠는지 상세하게 알려줬다. 피드백 받은 걸 바탕으로 다듬고 나니 확실히 더 괜찮아진 것 같았다.
이내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다. 친해지고 나서 그가 엄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작업은 물론이고 무언가에 대해 아리송한 기분이 들 때면 친구에게 어떤 것 같냐고 묻게 된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인지, 반대로 괜찮다고 하면 '엉망은 아닌가 보다' 안도하게 되는 게 있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이렇게 쓰는 게 괜찮은가' 싶어 몇 문단 보여주니, 친구가 문신 같다고 했다.
'그래, 그러면 공개해도 괜찮겠지.'
보면 볼수록 위의 티저 영상은 우리가 별로 친하지 않을 때라 쉽게 넘어가 진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이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하자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가 그렇다고 했다.)
책 맨 앞에 28년 된 친구에게 받은 추천 서문이 있다. 출발은 서지정보 출판사 서평란이었다. 비워두기는 뭐하고, 셀프로 쓰기도 웃겨서 방송작가로 일했던 친구에게 부탁했다. 오랜 시간 나를 꾸준히 봐온 사람인 만큼 나의 결과물에 대해 애정 있는 피드백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 줄을 읽자마자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날으는돌고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하고 싶은 게 가장 많은 사람이다.
쭉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온다.
저자의 성격처럼 적당한 유머와 깔끔하고 정돈된 문체에 점차 스며들게 된다.
육아 전쟁 가운데 기꺼이 짬을 내서 서문을 써준 것 자체도 고마웠지만, 이 문장이 특히 고마웠다.
초보 창작자로서 무언가를 만들 때 가장 고민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기본기고 또 하나는 '나답게'이다. 기본기는 말 그대로 기본기다. 비문을 쓰지 않는 것, 레퍼런스도 없이 상상으로 디자인하지 않는 것, 특별히 의도한 게 아니라면 연주할 때 불협화음을 내지 않는 것.
기본기를 다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기본기보다 어려운 게 '나답게'다. 아무래도 정답이 없어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음대에 다닐 때도 즉흥 연주가 많이 늘었다는 칭찬보다 '노래가 너를 닮았어'라는 말을 좋아했고, 이번 책도 문장이 쉽게 읽힌다는 칭찬보다 '책이 꼭 너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더 좋았다.
앞으로 만들어낼 것들도 그게 무엇이든 그냥 나 같았으면 좋겠다. 내가 특별히 잘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쳐가며 척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글, 음악, 그래픽. 세 가지를 조화롭게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글을 중심으로 음악과 그래픽이 파생되는 시즌제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 진행 중인 <떠날 수 있게 되니 머물 줄 알게 됐다>는 어떻게 보면 베타 버전이다.
(아래는 해야 할 일과 그에 따른 설명)
국내 온라인 및 오프라인 유통: 대형 서점 유통 완료 / 독립서점 유통 전
해외 주문형 출판: 영문판 번역 중
북 트레일러: 첫 번째 버전 완료
주제별 30초 내외의 음악 커버와 모션 시리즈: 틈틈이 레퍼런스 수집 중
음원 발매: 2곡 (쿠바 / 세상의 끝 그네) 작사 및 작곡 완료, 편곡 작업 중
뮤직비디오: 위 두 곡에 대한 뮤직비디오
소규모 공연: 10~15명 규모 or 스트리밍 라이브 계획
일단 이렇게 한 바퀴 돌려보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살펴보고, 가능한 선에서 다음 시즌을 위해 매뉴얼화해둘 생각이다. 공정별 공수가 파악되고 나면 조금 더 빠른 페이스의 콘텐츠 제작도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책 에필로그에 적었듯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소멸하지 않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회사를 다니며 사이드 프로젝트로 병행하다 보니 거북이처럼 기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놓지 않고 사부작거리고 있어요. 종종 놀러 와주세요!
(혹시라도 위 내용과 관련해서 궁금하신 점이 있는 분들은 hellodelphinus@gmail.com 으로 문의해주세요. 최대한 답변 해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