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한 번은 저렇게 살고 싶네요. 한 번은.
올해도 뜨거운 감자는 부동산 문제다. 20대와 30대가 집을 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특히 한국의 인구 절반이 몰려 있는 수도권에서 사람이 살만한 집을 산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부동산 문제는 단순히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미국도 여전히 부동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중인데, 그들 중 집을 포기하고 자동차를 타고 미국을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다. 미국인들은 그들을 digital nomad라고 부른다.
영화 「Nomadland」는 미국에서 시즌별로 일을 하며 벤을 타고 돌아다니는 Nomad들의 얘기를 주인공 펀(Fern)을 중심으로 사실적으로 담아낸 영화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관람했는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들이 대체 왜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구글에 “Nomad in America”라고 검색한 것이었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꽤 많은 기사가 있었고, 유목을 선택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광활한 자연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삶은 누군가 보기엔 남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I’m not just surviving, I’m thriving.”
영화의 시작과 끝이 꽤 인상적이다. 먼저 시작 장면을 얘기하고, 나중에 마지막 장면을 얘기하고자 한다. 어두웠던 영화 화면은 창고 셔터를 올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펀은 엠파이어에서 지낼 때 사용했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사용료를 내고 길을 떠난다. 펀이 향하는 곳은 아마존 물류 창고다. 실제로 아마존 물류 창고는 굉장히 바쁜 시즌인 9월-1월 사이에 50대부터 노인들을 고용해 일을 시킨다. 단기 아르바이트 같은 것인데, 그들이 받는 임금은 시급 10달러 정도라고 한다. 꽤 높은 급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로한 이를 고용할 경우 국가에서 시급의 40% 상당의 지원금이 나와 아마존이 그들에게 주는 시급은 단 6달러뿐이고, 나머지는 국가에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쁜 시즌이 끝나면, 그들을 가차 없이 자른다.
펀은 친구 린다 메이를 따라 밥 웰스의 RTR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데, 밥 웰스도, 린다 메이도, 펀과 데이브(데이빗 스트라탄)을 제외하고 모두 실제로 nomad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밥 웰스에 짧게 얘기하자면, 그는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계처럼 일만 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는 40살에 이혼 이후 재정난으로 고민하던 중 발견한 초록색 벤이다. 그는 “여기서 살아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고, 이윽고 벤을 구매해 안을 꾸미고 난 다음, 그는 일주일에 32시간만 일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그의 자식들과 캠핑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5년에 Cheap RV living이라는 채널을 만들었고, 경제 대공황 이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는 2015년에 애리조나의 쿼츠사이트에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작품에 등장하는 “Rubber Tramp Rendezvous(RTR)”이다.
펀은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정보를 공유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인생을 나눈다. 이런 Nomad의 삶이 영화에서 아름답고 낭만적으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정된 장소가 아니면 잘 수도 없고,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3D 직종의 일을 해야 하고, 혼자 다니는 경우 늘 고독과 함께해야 한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한다. 자동차 수리 비용이 없어서 누나에게 돈을 받는 장면을 생각하면, 이 삶이 굉장히 힘든 삶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작중 펀의 경우 암으로 자신의 남편을 잃고 Nomad의 삶을 시작했는데, 작중 그려지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광활한 대자연 속을 거닐지만, 그녀의 얼굴엔 웃음보다 삶의 고단함으로 깊게 파인 주름과 올라가지 않은 입꼬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자신에게 같이 살자고 하는 사람이 나오면 바로 거리를 둔다. 가령 데이브는 그녀에게 담배 끊기에 좋은 감초 스틱을 주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것을 씹지 않으며, 그가 그녀를 도와주려다가 접시를 깼다고 소리를 지른다(물론 데이브의 과한 친절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후 염치 불고하고 언니에게 돈을 빌리러 갔음에도 그곳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 싸우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예민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데이브의 집에서 그녀의 심리를 묘사하는 화면의 구성은 일품이다. 데이브의 집에서 그녀는 말 그대로 환대(Hospitality) 받는다. 만일 레비나스가 봤다면 저게 환대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성대한 저녁 이후 그녀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2층에서 내려와 계단 난간에 앉아 데이브와 그의 아들이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구경하게 된다. 이때 펀이 느끼는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일부러 그들과 펀의 구역을 나눈다. 펀은 계단과 계단 난간 사이에 있고, 집의 기둥을 중간선으로 그들이 연주하는 공간이 있다. 또한, 펀이 앉은 계단에는 2층 틈새로 들어온 빛뿐이지만, 그들은 전등 바로 아래에서 연주한다.
집을 나온 이후 엄청난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에서 그녀의 모습은, 그보다 심하게 요동치는 그녀의 심리를 그려낸다. 파도 앞에서 두 팔 벌려 서 있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안아주지 않는다. 노자의 말처럼, 天地不仁以萬物爲蒭狗다. 결국, 그녀는 다시 아마존으로 돌아가고, RTR에서 밥과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아픔을 공유한다. 그녀가 남편을 떠나보냈듯, 밥도 자신의 아들을 떠나보낸 다음부터는 기억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있다. 그때 밥은 펀에게 중요한 선택을 하게 하는 말을 해준다. “이 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은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난 그들에게 작별 인사는 안 해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죠. 그리곤 만나요. 1달 뒤든, 1년 뒤든, 더 훗날이라도 꼭 만나죠. 난 믿어요, 머지않아서 내 아들을 다시 만나리라는걸. 당신도 보를 만날 거예요.”
영화의 중반부 쯤 캠프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펀과 얘기를 나누던 중 펀이 사별한 것을 안 할머니는 반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반지는 둥근 원이죠. 원은 끝이 없어요. 그래서 끝없는 사랑을 뜻하죠. 빼고 싶어도 뺄 수 없을 거예요. " 이에 펀은 "못 빼죠."라고 답한다. 할머니의 말 속에서 반지가 의미하는 바가 운명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원의 상징성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펀은 반지의 운명에 예속된, 속박된 인간처럼 느껴진다. 그 운명이란, 평생 남편의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일 따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펀은 "못 빼죠."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제 펀은 자신의 운명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다. 자신의 짐을 모아뒀던 창고로 돌아가 모든 침을 처분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았던 US 석고로 돌아가 눈물을 흘린다.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고, 자신이 살았던 집에 들어가 본다. 이후 자신이 살았던 집 뒤뜰에 펼쳐진 사막을 향해 걸어간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가졌던 일종의 부채의식과도 같은 남편의 죽음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니체가 말한 amor fati처럼, 시시포스가 다시금 바위를 굴리는 것처럼, 그녀는 다시 도로 위를 달린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안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I’m not homeless. I’m just houseless.” Nomad들에게 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 집 같은 곳이다. Nomad와 관련한 기사를 보면 그들이 home의 의미를 재정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기사를 읽고 난 다음 영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나에게 있어서 집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감내하며 살아가야 할까?’ 두 질문 모두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고, 우리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 영화는 일단 한국인이 쉽게 받아들이긴 힘든 문화이긴 하다. 일단 우리가 사는 반도는 그렇게 넓지도 않고, 최근에야 캠핑이 엄청난 유행이긴 하지만, 이전에는 그렇지도 않았고, 지금도 Nomad와 같은 형태는 극소수다. 그래서인가,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씻는 것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불편하고, 자는 것도 불편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삶을 1년 정도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지면, 내가 사유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만일 영화에 등장하는, 그리고 지금도 Nomad이 삶을 사는 이들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일만 하며 산다면,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닌 회사를 위한 삶이 될 게 뻔하다. 그들은 동서양의 고대 철학이 던지는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자기 삶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그래서 나도 기회가 된다면, Nomad처럼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사진 출처 : 노매드랜드 : 네이버 영화 (naver.com)
글 속 정보 출처 : The New Nomads: Living Full-Time on the Road | The Saturday Evening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