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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Jul 17. 2021

「랑종」을 봤다. 안 볼 걸 그랬다.

차라리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다시 보세요.

랑종 스틸컷. 이때까진 몰랐지. 

 「랑종」 개봉 이틀 전에는 기대감이 있었다. 개봉 전에 본 주변 지인이 엄청 무섭다고 한 것도 있고, 다른 영화 유튜브 채널에서도 공포 영화답다는 얘기가 많았다. 개봉 당일 날에 올라온 관람평들을 보니 기대와는 달랐다. 유치하다, 낚였다 등의 평이 많아서 기대감이 뚝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덜 실망할 줄 알았는데, 더 큰 실망을 할 줄 몰랐다. 



 장점     


 작중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장면은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밍의 상태가 악화됐을 때 스크린에 한 컷씩 나온 각 종교의 상징물 들이다. 작중 이산 지역은 다양한 종교가 섞여 있다. 노이는 밍을 치료하기 위해 성당도 가고, 사원에도 가고, 기도할 때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그리고 밀어내고 거부했던 님을 애타게 찾는다. 노이와 밍의 모습은 급할 때 종교를 찾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평소에는 믿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상황이 급하니 신을 찾는다. 

 작중 밍을 처음 찍는 모습에서 밍은 무당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런 건 다 만들어진 연극이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도라에몽 신도 있는 거 아니냐고. 그녀의 말은, 일반적으로 무당이나 신을 부정하는 우리의 자세다. 작중 노이가 님에게 “바얀 신을 본 적 있어?”라는 말처럼, 무신론자는 “신을 본 적 있냐?”라는 말로 유신론자의 입장을 반박한다. 그런데 노이는 밍의 상황에 관해 원인을 알 수 없고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신을 애타게 찾는다. 하지만 그들이 신을 애타게 찾아봤자, 신들은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신의 존재를 애타게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이건 신이 존재한다, 혹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다. 일단 신의 존재는 우리가 증명 불가능한 영역에 있으니 말이다. 이 얘기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자세에 관한 것이다.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신다. “교회에 자주 나와야 한다.” 자주 가야 하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그중 제일은 믿음의 연속성을 위해서다. 드문드문 교회에 가는 사람을 보고 교회에서는 나이롱 신자, 혹은 냉담자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건, 한 번의 행동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꽤 긴 시간의 반복된, 진실한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불교에서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두 번째는 천상의 고기다. 노이는 시장에서 개고기를 판다. 정부에서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왜 막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면서 개고기를 판다. 어이가 없는 점은, 개고기를 팔면서 집에서 개를 키운다. 그리고 후에 밍이 개를 솥에 삶아버리고 먹는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슬퍼한다. 죽은 개를 “천상의 고기”라는 간판을 걸고 팔 때는 당당하지만, 자신의 개가 죽을 때는 슬퍼한다는 점이 이 상징의 포인트다. 노이의 말대로라면, 개고기를 먹은 밍의 영혼은 정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밍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는 밍이 식탁에 멍하니 앉아서 물에 날개가 빠진 곤충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 곤충은 날개가 물에 젖어서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다. 밍은 이 장면을 두 눈으로 응시하지만, 곤충을 구해주지 않는다. 사실 이 장면을 통해서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두 가지 내용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업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밍의 가족이 가진 업보는, 남편은 과거 사람을 학살했고, 노이는 신내림을 받기 싫어서 여동생님에게 뒤집어씌운 것과 개고기집을 운영하는 것이다. 선대의 업보에 의해 밍은 아무리 움직이고 달아나려고 해도, 물에 빠져 무거워진 곤충의 날개처럼, 자신의 가족이 쌓은 카르마의 연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신은 무심하다는 것이다. 곤충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보자. 곤충은 밍을 보고 소리 질렀을지도 모른다. 제발 구해주세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밍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멍하니 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서 소리 지르며 신에게 좀 도와달라 해봤자, 신은 우리를 즉각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감독은 관객들이 종교에 관해 다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길 원했던 거 같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미신적인 존재로 공포감을 조성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반부 이후부터는 자신이 잘 쌓아온 서사를 자신의 발로 걷어차고, 다시 차고, 마지막에는 기름을 부어 불태워버렸다.      



 단점      


 가장 큰 단점은 마닛의 부인이 부적을 떼고 문을 여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대체 왜 넣었을까?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곡성」에서 천우희의 충고를 무시하고 곽도원이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우희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곽도원은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닛의 부인은 다르다. 밍의 방에서 애기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애기는 요람에서 잘 자고 있다. 그냥 옆에 찍고 있는 카메라맨이 애기 들고 보여주면서 여기 있다고 말해주면 되는 건데, 그런 장면도 하나 없이 냅다 화분으로 머리를 때리고 방문을 연다. 

 이 장면을 보면 우리에게는 “대체 왜 저럼?”이라는 문장이 따라오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저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가령 과거 밍이 한 번 아이를 납치한 적 있으니, 거기서 한 번 더 아이가 위험해졌다는 식의 연출을 보여주려고 했으면, 진짜로 요람에 아이가 없거나, 누군가 아이를 들고 보여줘도 부인이 “이건 인형이잖아!”라는 대사 따위를 하며 착각하는 장면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없이 그냥 문을 열어버리니,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 이 장면 하나만으로 뒤에 장면은 안 봐도 됐다. 밍이 사람을 잡아먹고,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도 죽는 엔딩이 나올 게 너무나도 뻔하니까. 

 두 번째는 아무도 이산 지역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있는데 지역 병원에서 치료가 안 된다는 이유로 종교의 힘을 빌리는 게 말이 되나? 궁금해서 이산 지방 중 방콕에서 가장 거리가 먼 라오스 국경 지역의 붕깐 주까지 자동차로 얼마 걸리는지 확인했는데, 10시간 정도였다. 거기다가 다큐 촬영팀도 있으니 나가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는데, 해결되는 것도 없이 그 안에서 전전긍긍한다. 곡성에서도 이런 답답함이 있었다. 애가 정신이 나간 거 같으면 정신병원에 가거나 더 큰 병원에 가야 한다. 최소한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런 장면을 한 번 보여준 감독이, 2021년에 한 번 더 보여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아한 지점이다. 

 세 번째는 영화 중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야간 투시 기능이다. 사실 이와 같은 공포감을 조장하는 형식은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나 게임 「아웃라스트」에서 너무 잘 보여줬다. 그래서 그것 이상으로 더 나은 장면을 보여주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랑종」에서 두 작품이 보여준 것을 답습하는 것에 그친다는 점이 별로였다. 이와 더불어 영화 자체가 페이크 다큐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건 이유를 모르겠다. 중간중간 작중 인물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긴박한 감정을 고조시키려고 했던 거 같지만, 대화 없이 배우의 열연으로 긴박함을 올린 느낌이 더 컸다. 

 이런 단점들의 종합으로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화를 내거나 IF를 붙이게 된다. 만약 이 장면에서 이렇게 안 했다면 그리고 이런 행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이 말은, 그만큼 영화가 아쉽다는 말도 되고, 다른 말로는 진짜 못 만들었다는 얘기도 된다. 특히 이 영화는 나오기 전까지 여러 기대 요소가 많았다. 영화 평론가인 이동진의 경우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점도 같은 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물론 전문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건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오류에 빠지는 것과 다름없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대하게 된다. 영화를 우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나오고 나면 점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코로나의 공포를 극복하고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까울 뿐이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그래도 배우의 연기나 영상미는 괜찮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데 그런 걸 원하면 차라리 다른 영화를 보는 게 더 좋을 거 같다. 우리가 공포 영화에 기대하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 마음속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가?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중반부 이후로는 명확히 실패한 영화다. 단 한 장면으로 장르적 특성을 사라지게 했다. 

 나의 평은 이러하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꽤 괜찮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의 장면이 너무 별로다. 영화의 장점이라고 말한 부분은, 꼭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라는 측면에서는, 굳이 봐야 하는 영화 인가 싶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쓴소리하는 이유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보는 걸 추천한다. 욕하더라도 알고 욕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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