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티 주요 차인 홍차의 기원은 중국이다.
발효차인 홍차를 원래 우려먹었다는 설,
실크로드를 운반하며 자연적으로 발효되었다는 설,
배에 불이나 타고 남은 차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설 등 다양하다.
아편전쟁, 보스턴 차 사건 등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의 중심이었던 차,
스리랑카에는 언제, 어떻게 들어왔을까?
스리랑카는 홍차의 나라답게, 시내에 커피를 전문적으로 하는 카페가 많지 않다.
호텔에서도 네스카페 같은 인스턴트 커피를 내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론에서 차의 역사는 커피산업을 대체하며 1820년대에 시작된다.
물론 놀랍지 않게도 커피 산업은 영국 식민지 정책하에서 스리랑카의 정글을 베고 이루어진 단일 농업이었다.
영국은 인도와 극동의 이익을 위해 실론에 군대를 주둔할 필요가 있었지만 세금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1798년, 부임한 첫 총독 프레데릭 놀스(Frederic North) 때부터
식민지 자체 경제가 이 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영국의 숙제였다.
1824년, 5대 총독 에드워드 반스(Edward Barnes)가 커피 산업에 눈을 돌린다.
커피산업 연구를 장려하고, 캔디에서 콜롬보까지 도로 건설 등 인프라를 지원한다.
산악지대의 땅이 에이커당 불과 몇 펜스에 거래되고, 공공재정이 커피 재배 연구에 투입된다.
농장주와 상인들에게 인센티브가 제공된다.
영국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캔디 왕조가 점령되고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처럼, 중부 고원지대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시작된 쟁탈전.
1831년 에드워드의 임기말에는 커피농장들이 대부분의 캔디 주변 산악지대를 점령하였다.
1838년 자메이카 노예해방 이후, 서인도 회사의 커피산업이 갑작스럽게 쇠퇴한다.
영국 등 투자자 모험가들이 실론에서 커피산업의 성공을 되풀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산악지대에 남아 있는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다.
커피 단일 농업으로 거대한 원시 정글을 베어내고 다양한 초목들 사이에 커피를 재배한다.
초기 개척자(?)들은 임시로 지어진 오두막집에 살며 농장을 개척하고,
농장이 완성되면 벽지의 소도시에 멋진 방갈로를 지었다.
이러한 방갈로들이 농장주의 집으로, 최고급 호텔로, 게스트 하우스로
아직도 차농장마다 남아 그 시절을 기억한다.
커피 열매 수확을 위해 남인도의 이민 노동자를 고용한다.
남인도에서 넘어온 커피 노동자들이 바로 타밀족 차 노동자들의 선조이다.
아직도 차 노동자들은 차밭에서 구슬땀을 흘리지만,
최근 교육받은 후손들은 저임금인 차밭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고, 도시로 향한다.
초기 실론의 농장은 이러한 시스템으로 형성되었다.
1870년대 중반, 실론은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지가 되었다.
비록 커피산업의 영화는 길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