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안 먹는 유일한 음식은 바로 보신탕이다. 개고기. 어릴 적부터 엄마는 개고기라고 하면 기겁을 했고 덕분에 나도 보신탕을 먹지 않을 수 있었다. 장날이면 엄마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타고 모란시장에 가곤 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좁은 철창에 개 대여섯 마리가 끼여있고, 천장에는 죽은 개가 매달려있는 가게가 한쪽 골목에 줄이어 있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이해가 안 갔다. 엄마는 내 손을 이끌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교길에 학교 앞 병아리 가판대를 눈이 빠지게 쳐다보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로 노란 병아리를 손에 쥐었다. 작은 발걸음으로 총총 집에 갔는데, 엄마는 집에 동물을 들이는 걸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손에 폭 안긴 병아리를 보고 기겁을 했다.
- 아니, 이 어린 걸 데리고 와서 우짤려고 그러냐... 일단 들어와 봐.
집에 있는 박스에 수건을 깔아 임시 병아리 집을 뚝딱 만들어낸다.
엄마는 시골에서 살아서 여러 동물들과 일찌감치 함께한 시간이 길었다. 소도 있었고, 닭과 병아리는 물론이고, 강아지도 키웠다고 한다. 나보다 동물관리 경력이 훨씬 긴 베테랑이다. 그래서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시간은 주체의 운동 상태에 따라 상대적이다. 물리적인 성질도 그렇겠지만 인생을 살면서도 점점 삶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다. 10대였을 때의 시간과, 30대일 때의 시간의 속도. 지금은 눈을 감았다 뜨면 금세 하루가 지나가 있고 1년도 금방 금방 지나간다.
둘째와 셋째가 내 품으로 온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낯선 영역에 들어온 고양이들은 경계심을 잔뜩 안고 불손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 관찰하며 혹시 자신을 헤치치 않을까 비상태세를 갖춘다. 밥을 줘도 긴장하여 잘 먹지도 않는데, 내가 자리를 비키고 나서 다시 방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밥그릇이 비워져 있어 기특한 적도 많다.
▲ 하루만에 친해진 그들
한 손에 들어오던 아이들이 지금은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우람한 고양이가 돼버렸다. 나는 일명 확대범이 되었다. (잘 읽어야한다. 학대가 아니라 확대.) 사람 나이로 치면 30대에 들어선 아이들은 이젠 나와 동배이다. 깨 발랄했던 아깽이는 자라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외치는 듬직한 성묘가 되었다.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변한 것이 없는데 몸을 가누지도 못했던 아이들은 이제 제 몫을 하는 멋진 고양이가 되었다.
10살이 된 첫째는 까만털만 있던 자리에 흰털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가만히 눈을 바라보면 세상의 이치를 깨닳은 고양이 신선이 아닌가라는 착각도 든다.
또 다른 5년, 10년이 지나는 동안 어떤 변화가 생길까. 관절은 빠르게 닳아가고 털은 푸석해지며 먹던 습식캔도 먹지 않게 될까.
이런 모든 감정을 겪었을 엄마가 매번 잔소리를 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엄마도 엄마의 반려동물이 있었을 것이고, 상대적인 시간의 속도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