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다. 전자사전이라니. 인터넷이 보편화된 뒤로는 단어 검색만 하면 금방 영어 뜻을 알 수 있어서,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옛날 책들과 함께 박스에 넣어 두었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영어 단어 뜻을 자주 물어보는 아이 덕분에 전자사전을 다시 꺼내게 됐다.
거의 20년 전에 산 전자사전이지만, 사용하지 않아서 상태는 새것처럼 반짝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능이 내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롭다. 영한, 영영 사전은 물론이고, 일어와 중국어까지 지원되며, 여행 영어 회화와 영문 동화까지 포함돼 있다. 일정표 기능까지 있어서, “이걸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감탄하게 되는 다재다능한 물건이다.
전자사전이라고 하면, 어릴 적 엄마가 처음 사주신 두껍고 묵직했던 전자영어사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시 전자사전을 갖고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든 구해 오셔서 남동생과 나에게 보여주셨다. 내가 처음 시험 삼아 검색해 본 단어는 ‘apple’이었다. ‘사과’라는 뜻이 나오고, 발음 버튼을 누르면 “애플” 하고 또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전까지는 종이 사전을 펼쳐야 단어 뜻을 알 수 있었기에, 발음까지 들을 수 있는 전자사전은 혁명 그 자체였다. 그래서 교과서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 전자사전을 두드리며 신나게 숙제를 하곤 했다. 그 경험 덕분인지 나는 영어라는 과목을 유난히 좋아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도 늘어갔다. 엄마가 사주신 그 전자사전 덕분에 내가 영어를 잘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꺼낸 이 전자사전을 보니 묘한 감정이 스며든다. 이번에는 내가 내 아이를 위해 직접 준비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엄마가 그때 우리를 위해 해 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우리 아이에게 단어 찾는 법을 알려준다. 아이는 인터넷과 수많은 앱 속에서 자라지만, 그래도 전자사전을 함께 열어 보며 “이렇게 단어를 찾는 거야”라고 이야기해 본다.오랜만에 꺼낸 전자사전 하나가 이렇게 많은 추억을불러올 줄이야.
다시 한 번 'apple'을 눌러 보고, 발음 버튼도 눌러 본다. 전자사전에서 흘러나오는 딱딱하고 어색한 전자음 "애플, 애플." 이 소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엄마가 처음 가르쳐주신 영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잔잔히 흘러나와 나를 감싸는 듯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