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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udel Sep 10. 2020

진정한 장르의 통섭

창작 뮤지컬 "적벽"

판소리 뮤지컬 적벽은 정동극장의 '창작 ing 시리즈'로 2017년 첫선을 보인 후 이듬해부터 레퍼토리 공연으로 매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지난 9월 2일 케이 뮤지컬 온에어에서 네이버 티브이와  V-Live를 통해 실황 녹화 영상을 스트리밍 해서 안방 1열에서 볼 수 있었다.


'적벽'은 판소리 전승 다섯 바탕 중 하나인 '적벽가'에 기반을 둔 것으로,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와 조조가 벌인 '적벽대전'이 중심 서사이다. 섬세한 감성보다는 장중한 맛이 있는 '적벽가'는 특히 동편제 계열의 소리꾼들이 즐겨 불렀다고 한다.


삼국지를 읽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정말 많은 인물들이 열거되는 앞부분을 지나고 중반쯤이나 되어야 드디어 공명이 등장한다. 그것도 그냥 등장하는 게 아니라 삼고초려 이후에 등장하는데, 그를 기다리다 보면 책도 지루하다. 드디어 기다리던 공명이 등장하고 그와 주유가 함께한  적벽대전은 그야말로 삼국지의 백미다. 뮤지컬도 제목은 적벽이지만 적벽대전 보다 삼국지의 앞부분이 지루하게 전개된다. 물론 우리가 다 알법한 큰 사건만 배열한 것은 사실이나... 좀 빠른 비트의 판소리로 가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구성적인 면에서 적벽에다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일부러 루즈하게 연출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지루하긴 하였으나 방송에서도 잘 듣기 힘든 정악풍의 소리도 있어서 놀다. 역동적인 무대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우리 소리를 이렇게 잘 섞어 놓았을 줄이야.


무대 구성이 심플하다. 뒤쪽에 박스 안으로 기를 연주하시는 분들이 자리 잡았다. 우리 악기와 더불어 드럼 같은 서양악기도 보인다. 양쪽에 길게 세운 사선의 벽은 타고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여러 공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최근 선보이는 다른 뮤지컬들과 마찬가지로 조명이 탁월하다.

특히 이 부분

바닥에 글씨가 드러나게 연출된 조명이 굉장히 멋졌다. 요즈음은 공연장을 갈 때마다 새로운 조명들을 보는 맛이 있다. 조명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더니 더 이상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캐스팅. 젠더 프리 캐스팅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너무나 남성적인 서사인 삼국지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여인들이 등장했다. 공명과 주유(적벽대전을 그린 중국 영화에서도 잘 생긴 두 주인공이 나왔었다.)는 삼국지에서도 특별히 잘 생긴 캐릭터이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여자분들이라면 누구나 공명, 주유, 조자룡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ㅎㅎ 공명은 칼 따윈 쓰지 않는 책사 출신이니, 그리고 약관을 갓 지난 소년이었으니 가녀린 이미지라 쳐도 주유는 이미 한 나라의 대장군인데 그도 여인의 선을 가졌다니... 흐음 게다가 조자룡이라니~ 적들이 사방 천지인 전투에서 미 부인과 아두를 구해내는 용맹을 이미 떨쳤으며 어떤 전투에서도 백전불패인 조자룡까지 여인으로 등장시켰다. 그러나 중요한 건 위화감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칭찬받고 있는 캐스팅이 아닌가. 칭찬합니다.


뮤지컬 적벽에서 보이는 의상과 배우들의 스타일도 굉장히 좋았는데 바지 위에 겹쳐진 반쪽짜리 주름치마는 옷의 선들과 너무나 잘 조화되면서 고전적인 분위기까지 연출했다. 캐릭터에 따른 헤어스타일까지 넘나 멋짐... 유비가 그렇게 잘 생겼을 줄... 여태는 몰랐어요. 세상에~ 유비 역을 맡으신 배우님 정갈한 스타일부터 단정한 몸가짐. 책에서의 유비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저는 유비의 좋은 점 보단 나쁜 점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인지라... 적벽에서의 유비는 심쿵! 그 자체였어요.


위, 촉, 오가 벌인 이 전쟁을 표현하기 위해 적. 백. 흑의 간결한 색깔로 무대나 의상 조명등이 구성된 것도 흥미롭다. 간결한 색의 사용 덕분에 배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더 돋보인 게 아닌가 싶다. 

원래 국악인들이 부채를 달고 살긴 하지만, 이 부채 퍼포먼스는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놀랍기만 하다. 몸의 선 따라 아름답게 펼쳐지다가도 힘 있게 접히고 접거나 펼 때 나는 소리 하며, 부채 하나로도 창이 되기도 방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무대 전환까지 부채 하나로 이루어진다. 대박!!!



극 중 가장 재미있는 장면을 꼽으라면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달아나는 장면인데 달아나는 중에도 남아 있는 군사들을 데리고 점호를 실시하는 조조.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조조는 익히 알고 있던 조조와 만나면서 실제 조조가 남도 사람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주 찰떡인 캐릭터가 되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서 위용을 자랑했던 조조는 이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군사만을 데리고도 허세를 떤다. 그나마 남은 군사들도 성한 사람이 없는데, 조조의 대사가 그의 인간성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해서 더 재미있었다. 조조의 옆에 있는 사람은 책사 정욱인데 정욱아~ 를 열두 번쯤 하는 듯. 반복되는 정욱아~에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현대무용과 판소리 또 국악을 결합시켜 놓은 이 작품이 대학생들의 손에서 나왔다는 게 놀랍다. 첫 북이 두둥 울릴 때부터 이미 전율과 함께 시작된다. 


라디오 채널 클래식 FM을 즐겨 듣는데 오후 5시면 FM 풍류마을이라는 국악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다. 처음엔 그 시간이면 채널을 돌리기도 했는데 어느 날(아마 어느 산사 음악회에서 우리 악기들이 주는 소리에 매료되었을 때부터 였던 것 같다.) 지루하던 소리들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소리가 듣기 싫어서 관악 연주도 피하는 편인데, 태평소 소리는 어째 그렇게 흥이 나던지. 

FM풍류마을에서 한 번씩 들려주는 판소리 토막들은 너무 재미있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끝까지 들었을 때도 있었다. 아직 우리 음악의 재미를 모르신다면 클래식으로 편곡된 우리 악기 소리부터 들어 보시기를 권한다. 이미 서양 음악에 익숙해진 귀가  한결 편안하게 그렇지만 몸이 먼저 느끼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거다. 이상하게도 우리 가락들은 슬퍼도 어깨가 올라가고 빠른 곡조인데도 아릿함이 배어있다.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것도 있었는데, 노래하는 사람만 19명. 고어도 많고 판소리 자체에도 귀가 열려 있지 않은 관객들은 아마 알아듣기가 힘들었을 것 같았다. 원래도 목을 누르는 소리라 맑고 깨끗한 소리의 구현은 어려운 판소리이니 만큼 애절함에 더 무게가 실린 소리일 테다. 그런 것을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르니 가사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연장에서는 영어와 한국어로 자막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


많은 공연들을 보러 다녔지만 정작 우리 것에는 관심이 덜한 나를 돌아보게 되는 공연이기도 했고, 이런 멋진 공연이 우리나라에서만 혹은 동양권에서만 소개되지 않기를 바란다. 해가 거듭 될수록 더 잘 다듬어서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진정한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기를 바라 본다. 정동극장에 다시 올려진 날 직관을 기대하며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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