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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udel Sep 02. 2020

세상 어디에서도 통하는 음악

꿀벌과 천둥 - 온다 리쿠


벌과 천둥은 일본 하마마쓰시에서 3년마다 열리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관한 이야기다. 피아노 콩쿠르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출연하는 피아니스트부터 심사위원, 교수들뿐만 아니라 조율사 무대 매니저, 그 외에 이들의 주변 인물들까지 등장인물로 나온다. 나열만으로도 이 책이 장편이 될 수밖에 없다.



꿀벌의 날개 소리를 듣는 가자마 진과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말발굽 소리로 들리는 에이덴 아야, 거대한 음악이 안에 있어 꺼내기만 하면 되는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세 명의 천재. 그리고 다카시마 아카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콩쿠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온다 리쿠는 공연장의 분위기와 냄새 소리까지 입체적으로 묘사해 내서 책을 읽으면서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듯이 느껴졌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교를 대표하는 합창단 멤버였다. 시골 학교의 40명 남짓한 교 합창단이었는데 5학년부터 입단이 가능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날 합창단에 불려 갔다. 지도 선생님이 보여준 노래를 불렀는데 그 이후 합창단에서 소프라노 솔리스트를 맡았다.



작은 시골 학교는 공부만 잘하면 걔는 뭐든지 다 잘하는 줄 안다. 수학 경시대회부터 서예 대회까지 안 나간 대회가 없었고 매일 같이 혼자 학교에 남아 매번 다른 지도 선생님과 무슨 무슨 대회를 준비했다. 안 그래도 폐쇄적인 성격이라 친한 친구도 없었는데 초등학교 시절을 거의 혼자 보냈다. 선생님이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는 시간 동안 학교 도서관에 있었다. 읽는 게 병이 된 건 그때부터였지 싶다.



지역에 있는 초중고 14개 학교가 참가하는 대회에서 1등을 한 우리 학교 합창단은 대구에 있는 시민회관 (지금은 콘서트 하우스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경북 내 크고 작은 지역 예선에서 1등을 하고 올라온 다른 합창단과 2차 지역 예선을 치렀다. 각기 다른 흰색의 블라우스와 각기 다른 검은 치마와 바지 차림이었던 우리 합창단에 비해 다른 학교 합창단들의 의상은 티브이에서나 볼 만한 것들이었다. 빨간 빵모자까지 쓴 마칭밴드 같은 의상을 한 대구 계성 초등학교가 제일 눈에 띄었는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1등은 그 학교 꺼라는 생각을 했었다. 늘 세상일에 관심이 없던 나조차 주눅이 들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캄캄한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그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가 아득해져서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손발이 저려왔다. 얼핏 무대에서 들어오는 빛은 너무나 밝아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무대에 설 때 두려웠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순서가 되고 6학년부터 차례로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다음 순간 주변이 어두워지고 갑자기 머리 위에서 빛이 떨어졌다.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이제 빛에 익숙해진 눈이 관객들을 보고 있었다.

관객석 맨 뒤에서 쏘아져 나오던 그 빛을, 그날 무대 뒤의 습한 공기를, 헛디디지나 않을까 조심해야 했던 그 어둠을 소름 끼치던 떨림을 그리고 그 박수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28살 직장인, 아이 아빠인 아카시를 보면서 아직도 그 언저리를 헤매고 있는 나를 보는 듯했다. 음대를 나오고 다른 길을 걸어가다 그때의 꿈을 못 잊어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도전해 볼께로 시작한 콩쿠르의 준비는 생활인에게는 쉽지 않다. 책에서도 자세히 언급했지만 할아버지가 재벌이라야 가능하다. 일단 밥만 먹으면 연습에 매진해야 하는 피아노는 더 그렇다. 누군가 피아노는 악기 값이 안 드니까 그렇게 많이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그저 피아노 학원이 도처에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초등생이 벌써 라흐마니노프를 치는 세상이다.



100명 남짓 지원한 콩쿠르는 3차 예선을 거치고 나면 본선에는 6명이 남는다. 그 많은 동네 천재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친구들은 그만 두기라도 쉽다. 하늘을 본 친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그 언저리를 배회한다. 밥이라도 먹고살 수 있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 실체감, 이 충만감, 평범한 생활이 어딘가 멀게 느껴진다. 무대 위의 그 느낌, 빛 속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그곳으로 걸어가는 느낌, 기분 좋게 집중할 수 있는 그 장소, 관객들의 시선을 받은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친숙하면서도 숭고한 예술이 농축된 시간, 그리고 그 만족감, 흥분으로 가득한 갈채. 관객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그것을 이루어냈다는 감각. 무대를 떠날 때 온몸을 뒤덮었던 감격과 흥분을 다시금 되새겼다.

아아, 역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었다.

이 순간을 찾고 있었다.>




억지로 현실에 살던 아카시는 다시 하늘에 손 내민다. 1차 예선을 통과하고 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지만 2차 예선에는 붙지 못한다. 하늘에 더  가까이 닿아있는 천재들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각 곡마다의 섬세한 감상. 글이 너무나 공감각적이라 문득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늦은 밤 콩쿠르 곡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는데 플레이 버튼이 멈춰 있음에도 책 속에서 음악이 흐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주인공인 가자마 진의 말이 들리는 듯 했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음악을 이렇게나 가워 둔 건 사람이 아니냐고.




<빗소리와 바람의 온도를 느끼고, 그에 따라 작업도 바뀐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개화와 수확이 찾아온다. 어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인지를 초월한 기프트다.

음악은 행위다. 습관이다. 귀를 기울이면 거기에는 언제나 음악이 가득하다….>




가장 뼈 때리는 말이었던... 음악뿐 아니라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만 이 피라미드는 어떤 것보다 처절하고 치열하다.



<"바로 그거야. 그야 우리는 실상 '정규 음악교육'으로 입에 풀칠하고 있는 셈이니까. 어렸을 때부터 레슨비를 받고, 음대에 넣어 수업료를 받아내지. 그만큼 수고와 시간을 들인 소중한 제자를 어느 누가 돈 한 푼 낸 적 없는 정체 모를 인간과 똑같이 취급하려 들겠어? 그럴 걸 예상한 추천서야.”

미에코는 문득 근래 어디선가 들은 소문을 떠올렸다.

일본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한 어느 피아노 콩쿠르에서 월등한 천재 후보가 우승했지만 국내 음악계에 연줄이 하나도 없었고, 심사 위원은 물론 그 관계자에게도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던 탓에 최고점을 받고도 결국 시시한 이유를 핑계로 실격 처리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아이와 함께 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던 700명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단 세명만 뽑는 그 치열함 속에서 떨어져 나간 아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우리 아이는.... 열심히 살고 있다.



앞부분의 집중력에 비해 뒤쪽 3차 예선과 본선의 이야기는 평이해서 좀 힘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비 오는 하루.... 오랜만에 콩쿠르에 다녀온 듯 읽는 내내 지나치게 흥분되어서 진이 빠진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지.




https://youtu.be/wdiuU0DOl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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