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이에요. 저는 시대극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피하는 편인데요. 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울분이 차오르고 마음이 무너져서 온 몸이 녹아 버리기 때문에 되도록 피하죠.
사실 뮤지컬 "팬레터"에 대해서는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커피 한잔과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요. 배우들의 옷차림을 보는 순간 어쩌지? 그냥 끌까. 했었네요. 그런데 배우의 말투가 선명하게 들렸어요. 그 시대의 말투였죠. 배경 무대와 의상에 자연스레 녹아든 대사가 아주 좋았어요.
국내 창작 뮤지컬을 몇 편 봤는데, 우리말이 음악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은 브로드웨이식 뮤지컬 음악인데 받침이 많은 우리말이 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죠. 친구랑 얘기 나누면서 왜 우리식으로 만들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었어요. k.pop 기반의 뮤지컬을 만들지 굳이 서양 애들 꺼 가져다가 우리가 만든 척해야 되나 그런 얘기. 창작 뮤지컬로 만든 몇 편의 대형 뮤지컬을 보고 난 뒤 오간 대화라 그랬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 팬레터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네요. 음악과 가사 대사가 다 어우러져서 시너지가 생겼던 것 같아요. 음악적인 완성도가 높은 넘버였어요. 등장하는 배우들의 합이 굉장히 좋았는데 솔로도 좋았지만 이중창, 삼중창, 다섯 분이 함께한 중창도 화음이 잘 맞더라고요. 다만 음향이 고르지 못해 좀 불편하긴 했는데 할수록 나아지겠죠.
시대적인 비장미도 있었지만 배경이 되는 문살 뒤로 그림자들을 배치한 연출이 굉장히 좋았어요. 극 중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좋은 장치였던 것 같아요. 적절한 조명의 농도도 좋았고요. 굳이 단점을 찾으라면 조금 더 타이트했으면 했어요. 극의 전개가 꽤 루주했는데 시대적인 배경 서사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인물의 감정을 계속 점층 시키고자 했는지 너무 반복된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결국 우리들은 사랑의 모든 행태에 탐닉했으며, 사랑이 베풀어줄 수 있는 모든 희열을 맛보았네”
짧은 만남 이후 서로의 편지로 사랑을 나누고 그 편지가 영원히 남게 됐다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 이야기가 극의 전반에 등장하는데요.
얼핏 낭만적인 사랑이야기 같지만 뭔가 비밀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못 만날 이유가 없잖아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인가요.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한병철 님의 책이 생각나네요. 글자로만 하는 사랑이라니.
생각해 보니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글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상상이 되는 거죠. 너무나 취향 저격인 글을 보고 설레서 잠을 설친 적도 있고요. 글의 농도가 비슷하다면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김해진 역 김종구 배우, 정세훈 역 문태유 배우, 히카루 역 소정화 배우님 너무 고생하셨고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칠인회 다른 분들은 성함을 모르겠어서...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