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타인과 사회의 기준에 뒤쳐진 것 같아 불안했던 당신께
몇 년 전 아일랜드에서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학과 특성상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K 장녀로 태어나 한국어만을 편안하게 하던 나에게 영어로 토론하고 글을 쓰고 논문을 읽는 것은 꽤나 품이 많이 들어가고 고비가 많았던 시간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서재에 급히 마련한 작은 이케아 책상에 앉아, 네이버사전을 친구 삼아 모르는 단어들에 형광펜을 칠해가며 논문을 죽어라 읽고 있었다. 읽어야 하는 범위는 아직 반을 채 넘기지 못했고, 오늘도 이렇게 밤을 새야 하나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들어간 대학원이기에, 집은 직장 옆이고 학교에서는 한 시간 반이나 떨어진 거리였다. 아침 1교시 수업에 맞춰 가려면 통학시간까지 고려해 남은 시간은 5시간. 시간도 없고, 논문은 마음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시계는 벌써 밤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퇴근하여, 서재에 처박혀 영어논문과 씨름 중인 나 때문에 혼자 쓸쓸히 저녁시간을 보낸 후, 밤 열한 시 먼저 잠자리에 들겠다고 했던 나의 반려인 K가 자다 일어난 얼굴로 눈을 비비며 서재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 또깍"
케이가 갑자기 내가 공부하고 있던 내 서재의 불을 꺼버렸다.
당황한 나는 케이에게, 아직 내일 수업에서 요청한 모든 논문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 밤을 새야 할 것 같다고 먼저 잠을 자라고 했다. 그러자 케이가 말했다.
" 대학원 공부도 중요하지만, 네 삶과 일상을 사는 것도 그만큼 중요해."
"네가 오늘 다 읽지 못할 만큼의 과제량이라면 그건 네가 부족한 게 아니라, 그 수업의 과제량이 많았을 뿐이야.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야. 내일 수업을 듣고 다시 한번 보아도 괜찮아.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
케이가 나에게 말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정말 다음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옆자리의 친구들 과반수가 요청된 과제량을 채우지 못한 채, 아침 1교시 수업에 지친 듯 앉아 있었다.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도 과제와 논문과 판례(인권법학 수업이었기에 판례들을 읽어야 했다.) 양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친구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그 수업시간 교수님께 상황을 설명하였다. 결론적으로 다음 주 강의 시간에 꼭 읽고 와야 하는 읽기 자료와 부수적으로 훑고 와도 되는 자료들 이렇게 우선순위를 교수님과 함께 상의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케이의 말처럼, 그 과제를 모두 해가지 못했던 것은 나의 영어실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었고, 내가 모자란 사람이여서도 아니었다. 그저 수업스케줄에 비해 모두에게 과제의 양이 많았을 뿐이었다. 나는 그날 읽지 못했던 논문들을 수업을 마친 후 도서관에 들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문득, 어린 시절 숙제를 하지 못해 교실 앞에 나가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던 그 공간을 떠올렸다. 체벌이 허용되던 시기, 아주아주 어린 시절부터 숙제를 해가지 않으면 혼이나 거나 맞을 수 있다는 공포는 어쩌면 자라오면서 꾸준히 체화된 듯하다. 항상 무엇인가를 완성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다. 스스로의 모자람을 자책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 기분은 성인이 돼서도 회사생활 내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유튜브나 미디어에서는 미라클 모닝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 밤을 새 가며 일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성공신화가 많이들 들려온다. 직장에서도 동일하게 무리한 업무가 주어졌을 때, 야근을 하고 밤을 새 가며 그 일을 모두 다 해내는 사람들이 칭찬받고 박수를 받는다. 모두의 기준은 그 환경에서 가장 잘난 사람, 성과가 좋은 사람에게 맞춰진다. 업무의 완료일자도, 성공한 삶이라고 여겨지는 자산규모와 독서량도.
하지만, 그 누구도 그 기준에 의문을 제시하지 않는다. 업무 완료기일이 촉박할 때, 도저히 야근 없이는 마무리가 가능하지 않을 때, 일의 많음에 대해 의문을 갖거나 못하겠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저 촉박한 시간 내에 완료가 어려운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밤을 새워서 어렵게 그 일들을 끝내 놓고 몸도 마음도 서서히 과로로 상해 갈 뿐.
수많은 일들이 눈앞에서 나에게 맡겨질 때, 스스로의 부족함을 비난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정작 그 기준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드물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우리의 기준을 타인과 외부환경이 정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우리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그 일이 너무 많았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과하게 맡겨진 업무들과 과업, 환경이나 성취기준들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일을 모두 해내지 못한 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선택을 한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일이 하나의 이유로 생겨나지 않듯이, 내게 요구된 일과 기준들이 나와 단순히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내가 하루에 소화해 낼 수 있는 업무의 양이 기준이 아니라, 급하게 일을 몰아서 지시하는 회사의 기준 혹은 상급자의 리더십과 시간 관리 부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 모든 일들의 탓을 우리에게 돌린다.
그래서 지나친 업무요구와 과도한 과업들이 나를 숨 막히게 할 때,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 이 일을 끝내는 데에 잠을 줄이고, 밤을 새야 하는가? 그건 내 기준일까? 요청하는 상대의 기준일까? '. 세상에 내 건강과 일상을 해치면서까지 중요해져야 할 일은 없다. 내 삶에서는 나와 내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이제 내 기준은 내가 정해 본다. 그렇게 내 삶은 내 템포로 걸어가 보려 한다.
물론 내가 미루다 늦어진 일들에 대한 변명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리한 부탁과 과업이 나에게 닥칠 때, 나는 이제 내 개인의 역량부족만이 아닌 조금 더 넓게 그 환경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려 노력한다.
그리고, 개인의 부족함으로 모든 일들을 결론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오늘도 내 우선순위와 기준들을 생각해 보려 한다. 그리고 매 순간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던 나와 많은 다른 K 직장인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곰곰이 '정말 내가 문제일까?' 반문해 본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충분히 열심히 했다고 말하는 것에 인색하기에, 나에 대한 자책의 마음이 나를 휘감아 올 때면 오늘도 나는 나에게 가장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려고 노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