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지금 내 삶의 운전대는 누가 잡고 있나요? -주체성에 관한 고민
새해가 된 지도 꼬박 한 달이 지났다.
모두들 이미 새해 계획을 세우고 이미 실천하고도 남았을 지금,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신년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아직 차가운 아일랜드 겨울바람을 헤치며 동네 문구점으로 향한다. 예쁜 신년 다이어리도 고르고 다이어리에 걸맞은 조금 비싼 펜도 한 자루 사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커피를 한잔 내리며 방금 뜯은 다이어리와 새 펜을 들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올해는 어떤 계획을 세워볼까.
매년 계획 세우기는 일종의 의례 (Ritual) 같은 기분이다. 매번 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면서도 내 눈을 가리고 스스로를 속여본다. 150% 의 힘을 온전히 다해야 올 한 해 가까스로 다 이룰 수 있을 법한, 약간의 무리인 계획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해 본다.
그러나 이윽고, 그 모든 어마무지한 계획들을 머릿속에서 슥슥 지우고, 펜을 든 후, 잉크를 가득 머금은 펜으로 아직 새 종이 냄새가 가득한 다이어리 첫 장에 한 단어를 적어본다.
'A-G-E-N-C- Y (에이전시)'
신년 계획은 이 간단한 한 단어로 대체해 보려 한다.
그렇게 2024년 올해는 조금 더 내 삶의 에이전시 (AGENCY)를 가지고 살아보기로 한다.
Agency라는 단어는 주로, Have agency (에이전시를 가지다) 혹은 sense of agency (agency라는 감각)라는 형태로, have(가지다) 혹은 sense(감각하다)라는 단어들과 함께 사용된다.
한국어로 직역하여 가장 가까운 단어를 찾아보자면 '주체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캠브릿지 사전에 따른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할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회복지 현장과 수많은 인권학 담론에서는 이 Agency라는 개념이 크고 작은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의사판단이 가능한 일정 연령의 아동이 재판과정에서 양육자 중 누구와 살 것인가 혹은 아동보호기관을 갈 것인가 등을 결정할 때, 아이들의 선택과 의견 (agency)이 중요한 판단의 기준 중 하나가 된다. 이러한 결정은 아동의 인권이 보장되는 방향에서의 결정을 하기 위함이다.
다른 예로는 내가 일하던 지적장애인 관련 사회복지기관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 제공에 있어서, 국가나 사회복지기관에서 담당자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것들, 예컨대 건강에 좋은 운동프로그램이나 식단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의사를 묻고 원하는 서비스들을 조사한 후, 이러한 개인의 의사와 가장 가까운 프로그램과 식사메뉴들을 개발하도록 했다. 어떠한 프로그램과 의사결정에서도 서비스를 받는 개인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인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이러한 예들은 취약계층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진 개인으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크고 작은 일상의 선택에 있어 자기 의견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도록, 다만 그들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회나 복지서비스의 역할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Agency의 개념은 비단 인권학이나 사회복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에 접목시켜 보자면, 나의 인권이 보장받는 내 삶이란, 개인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며 일상의 크고 작은 판단들을 스스로 내리고, 그러한 판단들로 내 인생을 채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주체성( agency)을 가지고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좌회전 우회전, 때때로 유턴을 하며 살고 있을 때, 내 새해 계획처럼 Agency가 있는 삶을 살자는 계획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온전히 나의 것이지만.
Agency라는 이 짧고 간단한 한 단어가 듣기에는 쉬운 단어 같아 보이지만, 사실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수많은 크고 작은 선택에서 항상 Agency, 주체성을 가지고 모든 순간순간의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다양한 숏폼 콘텐츠들과 미디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타인의 개인적인 공간과 삶을 핸드폰에서 어플 몇 번만 클릭하면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히 내 삶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게 되기 쉽다. 그리고 내 선택에 있어서도 타인의 시선이나 주변의 반응들을 무시하기 어렵기도 하다.
누군가는 매년 해외여행을 가고, 누군가는 젊은 나이에 상위 0.01%의 자산가가 되고, 누군가는 꼭 이런 사람을 반려인 혹은 애인으로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그 모든 이야기들에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주체성을 가지고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목적지를 향해, 계속 운전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쉽지만은 않은 일 같다.
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그 모든 다른 사람들의 내비게이션 안내를 끄고,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은 후,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가며 내 운전대는 내가 잡고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선택을 해보는 새해가 돼 보자고 다짐한다.
AGENCY!
참고자료
1. Cambridge Dictionary -https://dictionary.cambridge.org/dictionary/english/agency
2. Griffin, James, 'Autonomy', On Human Rights (Oxford2008; online edn, Oxford Academic, 1 May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