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선배 A가 몇 년만에 회사를 찾아왔다. 후배들을 위해 도움될 만한 얘기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초대를 받고서였다.
선배 A는 초대에 흔쾌히 응했다. 덕분에 그로부터 직장 다닐 때 겪었던 이런저런 경험담이라든지,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느라 퇴직하고 난 뒤엔 망가진 몸 때문에 한동안 꽤나 고생했노라는 얘기 등 생생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참 많은 얘기들을 들려줬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아내와 얽힌 에피소드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퇴직을 하고 난 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몸 때문에 결국 크게 탈이 나서 수술을 받게 됐다는 얘기였다.
어느 정도 규모 수술이었는지까진 잘 모르겠으되 수술 후 선배 A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마주한 건 남편 걱정으로 많이 수척해진 아내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남편 노릇도 못했는데 이렇게 또 큰 걱정을 끼치고 말았구나!' 싶어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들더란다.
그래서 퇴원 후 그는 두 번 다시는 그같은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열심히 운동을 했다고 한다. 인생은 60부터라 했고, 평균수명도 크게 늘어나 최소한 앞으로도 20~30년은 더 써야 할 몸인 만큼 건강하게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선배 A는 아내를 위해 뭔가 하나 꼭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단다. 선물 같은 건 몇 번 줘봤지만 그런 물질적인 게 아니라 마음의 선물 같은 걸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얼마 남지 않은 아내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기로 했다. 생일 때마다 평생 얻어먹기만 해왔으니 자신도 아내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던 거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여기저기 귀동냥을 더해 선배 A는 결국 아내 생일날 정성을 다해 미역국을 끓여줬다. 생전 처음 끓여보는 미역국이라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성의가 괘씸해서였던지 아내는 아주 매우 맛있게 미역국을 먹어줬다.
버뜨(but), 선배 A는 그로부터 불과 몇십 분도 지나지 않아 아내로부터 욕 아닌 욕을 먹어야만 했다. 난생 처음 미역국을 끓여 아내 생일상을 차려줬다는 셀프감동에 취해 아무 생각없이 뒷짐을 지고 앉아있었던 게 그 원인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내는 "밥상을 차려 대접한다는 건 설거지까지 끝나야 마무리되는 거에욧!" 하고 일침을 날렸던 거다. 셀프감동에 빠져있던 선배 A로선 무방비 상태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다.
이 얘기를 전하며 선배 A는 말했다. 누군가를 위해 어떤 일을 할 때는 이벤트성으로 확 터뜨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고민하고, 나아가 그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뒷마무리까지 꼼꼼하게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면서 그는 덧붙여 말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걸 속으로만 꿍하고 얘기 안해주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다행히 내 아내는 그 잘못된 걸 바로 알려줌으로써 앞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정말 고마웠노라고 말이다. 참 멋진 부부요, 참 멋진 노후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퇴직 후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서로 삐걱거리는 부부들이 참 많다. 밖으로만 떠돌던 남편이 퇴직 후 집안에 껌딱지처럼 붙어앉아 삼식이 노릇을 한다거나, 자기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며 남편이 아내 치마꼬리를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사례도 종종 있다 보니 없던 갈등도 갑자기 생기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선배 A 부부는 앞으로 행복한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평생 직장일 하느라 고생한 남편 좀 챙겨주면 어디 덧나느냐는 일방적인 투정 대신, 당신이 언제부터 이런 거 챙겨줬다고 난리냐는 볼메인 소리 대신 비록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긴 하지만 서로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