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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작업 Oct 27. 2021

ESSAY / 심해로부터

더이상 가라앉지도 못하는 이 곳에서

내 이름의 중간 글자는 한자로 표기하면 '물 수(水)'다. 그래서인지, 내 삶은 우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물과 가까웠다.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25년을 살았다. 여행을 하거나,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비가 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 내가 체감하지 못했던 순간들 속 몇몇 장면은 물과의 연결성이 분명 있었을 테다. 억지라면 억지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랠러번스가 있지 않나.. 나와 물은. 사람 이름에 '水'자를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들었다. 주변만 둘러봐도, '수'가 들어가는 친구들의 한자는 나와 다르다. 빼어나거나, 재주 좋거나 뭐 그런 문장형이면서도 진취적인 뜻이 대부분이다. 왜 나는 물일까. 애석하게도 내 이름을 이렇게 지어 놓은 사람과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관계가 되었기에, 물을 수가 없다. 그래서 멋대로 정의했다. 나는 물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흐르던 때가 있었다. 유속을 높이기도, 낮추기도, 범람하기도, 말라가기도 하면서 그저 나아갈 줄만 알았다. 지금 지나가는 곳이 어딘지 가늠하지 못했기에 정착할 수 없었다. 꽤나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음을 갈구했고, 정지하는 방법을 몰랐다. 쉼이라는 한 음절을 막연함이라는 세 음절로 늘려 해석했다. 쉼표라는 수문에 가둬지는 것이 싫어, 무작정 나를 방류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휘젓고 다니다 결국 다다른 곳은 삶의 하류였다. 누구의 시선도, 유혹도 닿지 않은 곳에서 그리도 깨끗하고 순수했던  마음은, 자신이 향하는 곳이 생에 가장 낮은 지점 인지도 모르는 채 처절하게 진보했던 것이다.



그래, 나라는 물은 하류까지 다다랐다. 요즘 유행하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게임 참가자들만이 하류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을까. 정서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보다 반짝였는데. 누구보다 건강하고, 생기 있었으며, 나에 대해 명확했는데. 지금은 한 곳에 고인 채 오염되고 있었다. 평가와, 기대와, 중압감과, 탁함과, 아득함의 혼재에 의해 끊임없이 훼손되고, 방치되고 있다. 누군가 나의 표면을 본다면 뒷걸음칠 정도로, 볼품없다. 문제가 뭘까. 무엇이 나를 이곳에 보냈을까. 어디로 화살을 날려야 할까. 나의 화살은 힘이 있나.



어느샌가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네가 원하던 삶이 이게 맞니. 내 삶의 속력과 방향은 보여주기 식이 었을 수도 있겠다. 단단한 사람인 척 꾸며낸 과장과 왜곡의 역사일 수도 있겠다. 나의 빛은 형편없는 꿈과 더 형편없는 목표를 감추기 위해 최대한 있어 보이는 것으로 골라 만들어낸 인위적인 조명일 수 있겠다. 스스로를 향한 무자비한 질문들은 무의미도, 유의미도 될 수 없었다. 따갑고 건조하나 결코 마르지 않는, 잔인한 메아리가 이어졌다. 해치는 것은 쉬웠다. 하류에서 더 하류로,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잊기 위해 폭우처럼 울었다. 가장 깊은 곳을 내비치기 싫어 넘치도록 울어 댔다. 이내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위치한 곳은 망연한 바다였다.



모든 것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곳, 바다. 이제 난 뭘 해야 할까. 스스로를 향한 물음들은 질문이 아닌 질타였기에, 답을 찾지 못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더 나빠질 상황도 없다. 이대로 가라앉는 것만이 유일한 수일지도 모르겠다. 밑으로, 더 밑으로, 종내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까마득한 심해로. 시야조차 확보되지 않는 곳에서 무엇이 꿈틀대는지, 무엇이 파묻혀 있는지 측정할 수 없다. 나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대로 괜찮겠니. 괜찮지 않다면, 다시 올라갈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니. 



올라가고 싶다. 사회적 위치, 인정, 역할의 상승이 아닌, 정신의 승화를 원한다. 행복하진 않더라도 불행은 덜어내고 싶다. 덜어낸 무게만큼 부양하고 싶다. 마이너스와 제로 사이를 떠도는 행위를 그만두고 싶다. 삶에 드리운 불안한 해무를 걷어내고, 반짝이는 햇빛의 윤슬을 누리고 싶다. 아무래도 나의 심해에서, 답을 찾아야겠다. 너를 옥죄고 있는 무거운 추를 자르고 이제 그만 편안해져라. 괴로움을 위한 괴로움을 그만두어라.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에 신경을 집중해라. 촛불을 켜라. 마음껏 뛰어다녀라. 어제를 잊을 수 있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생각이 아닌 몸부터 앞세워라. 나는 나에게 첨예한 질문이 아닌 신비로운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주문의 효과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의 가치를 믿을 수도 없다. 다들 나를 안심시키는데, 나만 나를 의심한다. 그러나 오늘도 홀린 듯 외운다. 매일, 딱 1그램만 더 가벼워질 수 있기를. 행복의 증량이 아닌, 불행의 감량을 목표로. 심해로부터 외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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