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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작업 Feb 17. 2021

ESSAY / 시선에 초점을 더해

흐려진 세상에 선명히 집중하는 방법

집중력. 어려서부터 내겐 거리가 먼 단어였다. 유치원생이었던가, 초등학생이었던가 아무튼 세상에 발돋움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지극히 산만한 아이였다. 단적인 예로, 이 별난 성격을 누르기 위해 바둑학원에 보내졌을 정도다.



물론 학원은 얼마 가지 않아 그만뒀다. 우습게도 바둑학원의 유년부란, 모두 우리처럼 산만해서 보내진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모든 산만함의 시너지. 나는 옆자리 아이와 알까기를 두다 바둑알로 상대방의 이마를 맞춰버리는 바람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꽤나 잦았기에 엄마가 먼저 항복한 케이스였다. 그렇게 부산스러운 아이는 그 이후로도 고요함, 조신함과는 좁혀지지 못한 채 자라왔다.



그렇다고 멀티플레이가 잘되는 타입도 아니다. 내 신경은 특정한 부분에 쭉 귀속되어 있지도, 여러 곳에 균일한 퍼져있지도 못한 채 늘 그 사이를 배회하곤 했다. 내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오래 두고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지금 무슨 생각 중이었지?' 하며 아득히 고민 중일 것이다. 아이디어 전달 시간이 5시라고 치면, 심할 때는 4시까지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다 그 이후에 살고자 펜을 잡는 타입. 영화 한 편, 드라마 한 회차가 흐르는 시간에도 부지런히 주변을 돌아보는 타입이다. 그런 내게 딱 한번, 집중의 기간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너무 자주 언급해 주변 사람들은 이미 질릴 대로 질릴 듯한 그곳, 치앙마이에서의 일이다. 약 3년쯤 전, 25살이던 당시의 나에게 덮쳐온 여러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나는 스스로에게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선물했다. 잠깐이나마 속세(?)를 떠난 휴식에 잠들기 위해서였다. 따지고보면 정확히 한 달은 아니고, 한 3주 남짓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치앙마이 특유의 압도적 차분함과 편안한 초록빛. 그 속의 나는 나에게 남김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신맛이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고수가 들어간 음식은 아무래도 입에 맛지 않는다는 것, 김치 없이도 거뜬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역시나 최은영 작가의 문장이 나의 울림점이라는 것, 생존을 위해 얼마든지 인싸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것. 그곳에서 알게 된 내 모습들이었다. 취향과 마주하고, 흥미를 일깨울 수 있었던 값진 시간들. 그 시간들이 현재를 살아갈 자산이 되어준 것만으로, 다녀온 지 3년째로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내가 치앙마이를 찬양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나는 그곳에서 집중력의 미학을 절감한 채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그 자체로 어수선한 공간이라는 것을. 자신에게도, 주변에게도, 제3의 어떤 것에게도. 어느 한 곳에라도 시선을 묶어두기에 이곳은 너무도 혼란하다. 하루 24시간 내내 정신을 흔들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요즘 취미는 뭐예요?'라는 무책임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활동을 할 때 행복감에 젖어가는지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면서 아직 취미를 발굴하지 못했다는 대답에는 '이 사람 참, 무채색의 인간이구나'라고 판단해버리는 세상이다.



물론 나도 그 세상에 편입된 사람이기에 누군가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섣불렀던 그 때의 질시. 그러고 보면 그 질문의 기저에는 묻는 이의 절실함이 녹아있었겠구나 싶다. 나는 이토록 회색이니, 당신의 색깔에라도 물들어보고 싶다는 심산일 테다. 우리는 참으로 엉성하게 편집된 일상을 살고 있구나. 어느 한 장면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꿰매어진 하루들. 그 속에 스스로에 대한 관심은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자연스레 나는 다시금 집중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브런치를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고민의 끝에, 브런치를 집중의 공간으로 두겠다 결정했다. 어지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잠깐이라도 내가 사랑하는 것 혹은 사랑하게 될 것들에 집중할 기회. 좋아하는 커피, 나에게 맞는 양주 취향, 단편적으로 떠다니는 생각의 정돈, 나를 이끄는 사람들, 몇 번이고 마음이 향하는 장소 등. 이렇게라도 미흡한 집중력을 발휘해보고 싶다. 내가 나로서 살아갈 생애는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았을 텐데, 재즈를 좋아하는지 팝을 좋아하는지 조차 모르고 죽으면 참으로 억울하지 않은가. 나를 알아가는 것을 더 이상 유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직 내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디퓨저조차 가장 대중적인 리뷰를 받은 제품을 고르곤 한다.



이틀 , 왼쪽 팔에 타투를 했다. 꽃의 종류이면서 나의 이름이기도  '수련' 도안으로 말이다. 활짝  모습과 아직 못다  봉오리가 교차하는 모양인데,  교차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다만 '수련'으로  데에는,  글의 가치관이 담겨있다고   있겠다.  이름을 소중히, 나를  소중히. 나는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닌 고유한 나로서 존재해야 하니까. 가끔씩 세상의 산만함에 나의 자리를 잃어갈 , 소매를 걷고 수련을 들여다봐야겠다. 그래, 너는 여전히 이토록 변함없이 각인되어 있구나. 그러면  또한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게 살아갈  있을 것이다. 오늘도 혼잡한 세상에 뚜렷한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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