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수능 추억을 나눈다. 애들 시험 준비하며 힘들었던 기억, 시험장 들여보내고 뒤통수 바라보던 마음.
딸의 첫 번째 수능은 2017년도였는데 수능 전 날 포항에 강도 5.4 지진이 났다. 우리나라 기상청 관측 이래 두 번째로 큰 지진이었고 지역 피해가 컸다. 고시장으로 지정된 포항에 있는 학교 15개 중 10군데가 벽에 금이 가 안정성 문제로 수능이 일주일 연기됐다. 불수능 물수능은 들어봤지만 지진수능이라니. 자연재해로 수능시험이 연기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올해 남동생네 큰 조카가 고3이라 연락을 넣었다. 침착하게 잘하고 오라는 응원에 조카는 "네, 고모"하며 담담한데 남동생과 올케는 걱정이 많고 긴장하는 듯 보였다. 자식이 어려운 고개를 넘을 때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은 그럴 것이다.
나는 1988년 학력고사를 봤다. 경상북도 작은 시골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1학년 때 서울에서 그곳으로 이사했다. 아빠는 마을이 생긴 이래 한 번도 교회가 세워진 적 없는 동네에 자리 잡았다. 허물어져가는 빈 시골집을 손수 고쳐 예배당과 살림집을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 눈총 받으며 전도활동을 하고 아이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열었다. 호시탐탐 우리를 내쫓으려 기회를 엿보는 토박이 주민 밭일, 과수원일 도와가며 친해지려 노력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부터 기숙사 생활을 한 나는 일요일엔 집으로 가 예배시간에 풍금을 쳤다. 얻은 건지 중고로 산 건지 모르겠지만 건반 두 개가 소리 나지 않아 안 그래도 실력이 부족한 반주를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1년이 지나자 교회에 오는 어른은 세명뿐이었지만 동네 아이들은 거의 다 나와 열 명이 넘었다. 주일학교 아이들은 내 차지가 되곤 했다. 복음성가를 같이 부르고 부활절 계란을 장식하고 크리스마스엔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연극을 연습했다. 달가운 마음은 아니었다. 아빠와 엄마가 애쓰는 걸 알기에 돕지 않을 수 없어 억지로 한 일이었다. 내가 고3이 된 그해 가을 아빠는 가끔 왕래하던 전도사님께 교회를 맡기고 부산으로 이사했다. 시골로 내려올 때도 그랬지만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을 전하며 아빠는 자신의 사명이 여기까지라고 말했다.
나는 아빠가 목회활동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부산으로 이사한다는 말이 조금은 반가웠다. 학력고사가 몇 달 밖에 남지 않아 전학하기 곤란했다. 엄마, 아빠, 동생만 부산으로 가고 나는 남았다.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이주에 한 번은 기숙사를 비워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신세를 졌다.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집에 데려가 재워 주었다. 어떤 경우는 순번을 정해놓은 듯 먼저 다가와 이번 주엔 자기 집에서 자라고 말해 주기도 했다. 친구들도 그 집 어른들도 편하게 대해주고 잘해주었지만 나는 언제나 필요이상 조심스럽고 불편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랬다. 전학 온 나를 착하게 반겨주는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굴었다. 사정을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 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나쁜 감정은 모두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늘 피해자인양 굴었다. 서울에서 학교 잘 다니는 애를 시골로 끌고 올 때는 언제고 부산으로 가버린 엄마 아빠가 미웠다. 그런데도 엄마가 전화로 안부를 물을 때마다 걱정하지 말라고 잘 지낸다고 친구 집에 가면 된다고 말하는 혹은 말해야 하는 상황이 화가 났다. 착한 척 강한 척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는 내가 싫었다.
학력고사가 5주쯤 남았을 때 부산으로 내려왔다. 동갑내기 6개월 빠른 사촌언니가 다니는 독서실에 등록했다. 언니 따라 들어간 독서실은 마음에 쏙 들었다. 기숙사에선 앉은뱅이 작은 책상이 다였고 학교는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독서실은 아늑한 데다 휴게실도 있고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베기지 않는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 이 좋은 곳에서 컵라면 먹고 잠만 자는 애들이 이상했다. 나는 독서실이 너무 좋아 아침 일찍 가고 밤늦게 돌아왔다. 어쩌면 미움이 마음에 가득 차 집에 있기 싫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새벽기도를 다녔다. 4시 30분이면 일어나 교회에 갔다. 건넌방에서 잠결에 엄마가 나가는 문 소리를 듣곤 했다. 엄마는 6시쯤 돌아와 밥을 하고 국을 끓여 나를 먹였다. 해뜨기 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아침을 먹고 나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피곤한 얼굴과 짜증 묻은 뒤통수로 집을 나갔다. 그런 내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빠도 엄마도 내게 아무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남들은 보약까지 지어 먹인다는 고3 딸을 두고 이사도 했을 거라 속으로 화냈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돌아온 날 같이 시험 본 사촌 언니와 나를 위해 넷째 이모가 저녁을 차려줬다. 이모가 말했다. "네 시험 잘 보라고 너네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니. 몇 달을 새벽마다 그렇게 기도하러 다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좀 놀랐다. 새벽기도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엄마가 가고 싶어 다니는 줄 알았다. 이모 말을 들으니 엄마가 두고 온 나 때문에 여러 번 울고 하루 열두 시간 단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녔다 했다. 단추 찍는 기계에 손가락이 끼어 응급실에 다녀온 다음 날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새벽에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러 갔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엄마도 나랑 같다는 걸 깨달았다. 자주 울었지만 엄마에겐 내색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말하지 못했다. 혼자 시골에서 지낼 때도 낯선 부산에 왔을 때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은 기도로 지탱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가까운 사이엔 이상하게 전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 말 안 해도 알겠지 싶어서 차마 알아 달라 하기 어려워 못하는 말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두 손 모으고 눈 감지 않아도 아이들을 떠올리는 순간이 그대로 기도가 되곤 한다. 엄마도 내게 그랬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가 기도해 줘서 그래.'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기쁜 일이 생기면 엄마 덕분이라 생각했다. 기도란 간절한 바람이고 엄마만큼 나의 행복을 간절히 바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 모르게 나를 위해 엄마는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을까.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을 때도 기도했다. 네 명 손주 하나하나 이름 부르며 기도하고 자기는 그렇게 아프면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면서 다 큰 자식들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
동생에게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손주 잘되라고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셨니.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곁에 없는 엄마를 이렇게 느낀다. 이럴 때면 꼭 엄마가 옆에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진심과 간절한 바람은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 기도다. 받은 기도로 오늘을 산다. 간절한 기도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고 깊은 사랑은 그렇게 쉽게 이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