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은 이해보단 암기였다.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가 만나면 물이 된다는데 이해가 안 됐다. 기체와 기체가 만나 어떻게 액체가 되지.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 그랬다. 네 머리로 이해하려고 들지 마. 그냥 닥치고 암기.
물은 상온에서 액체다. 0도 이하에선 고체가 되고 100도가 넘으면 기체로 변한다. '상전이'란 온도나 압력 같은 외부 조건에 따라 기체가 액체가 되거나 액체가 고체로 바뀌는 걸 말한다. 상이 바뀌었다 하여 '상전이'라 부른다.
물의 상전이는 이해가 쉽다. 일상에서 관찰 가능하다. 얼음 얼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겨울엔 김 모락모락 뜨거운 코코아 한 잔이면 몸이 노곤노곤. 아이고, 맛있어. 어라, 먹는 얘기로 빠졌네. 먹는 게 남는 거 아닐까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집중해 보자.
물만 그런 줄 알았는데 수소와 산소도 상전이가 일어난다. 수소는 영하 253도 이하가 되면 액체가 되고 산소는 영하 183도 이하에선 액체다. 상전이 조건이 영하 253도니까 일상에서 볼 수는 없지만 수소와 산소도 험악하게 온도를 낮추면 액체가 된다. 그렇다면 기체와 기체가 만나 액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이해는 안돼도 그럴 수 있겠네 조금 너그러워진다.
물을 보며 수소와 산소를 떠올리기 어려운 이유는 그러니까 내가 화학을 못하는 이유는 '창발'때문이다. 기본입자와 기본입자가 만나 원자가 되는데, 있잖은가 원자, 그 엄청 쪼그마한 애. 리처드 파인만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남길 단 하나의 이론으로 꼽은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할 때 그 원자. 수소도 산소도 원자다.
원자는 기본입자가 만나 이루어지지만 기본입자와 다른 특성을 갖는다. 원자와 원자가 만나 분자가 되는데 분자 역시 원자와 다르다. 기본입자끼리 원자끼리 만날 때마다 창발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소와 산소가 만날 때도 창발이 일어난다. 존재하지 않았던 예측하기 힘든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것을 '창발'이라 부른다. 이러니 내가 물을 이해 못 하지.
과학자는 사랑을 어떻게 고백하냐고 물었다.
"너는 나의 상전이야."
해석하자면 너는 또 다른 나야 쯤이고
"너는 날 상전이시켰어."
너로 인해 나는 다른 사람이 됐어. 뭐 이쯤 되겠다.
들으면서 웃었는데 그렇다면 결혼은 창발일까 란 생각이 들었다. 너와 내가 결합하여 전혀 다른 무엇이 되는, 그렇다면 아이는 창발의 결과이려나.
인간은 인생을 살며 여러 번 역할이 이동하고 다르게 불린다. 딸은 엄마로 아들은 아빠로 학생은 직장인으로 사장님으로 은퇴자로 상전이 한다. 내면의 상전이도 일어난다. 고통 혹은 깨달음으로 우리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호접몽으로 유명한 장자는 나비와 사람 중 어떤 것이 자신인지 분간할 수 없다 했고 싯다르타 왕자는 출가하여 고타마가 되고 해탈하여 붓다가 됐다. 깨달음을 통한 상전이다.
상전이란 단어가 묘하게 위로가 됐다. 지금 현재 내 모습은 고정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닌가. 끝이 아니라는 말, 이게 다가 아니라는 뜻. 우리는 상전이 할 수 있다. 혹독한 현실이 고통스럽다면 그건 어쩌면 상전이 되기 위한 과정일지 모른다. 수소는 무려 영하 253도에서 물은 100도에서 상전이 되지 않는가. 진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상전이는 의도와 목적이 없지만 인간의 상전이는 방향과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 고통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지만 같은 고통이라 할지라도 고통 후 우리의 모습이 서로 다른 까닭이다.
창발의 핵심은 무엇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시간과 돈을 아끼고 명상하고 감사하는 순간이 모여 어떤 창발을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쓰는 글 한 편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무엇이 되게 할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반드시 창발이 일어난다는 사실뿐이다. 수소나 산소, 물보다 복잡하며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 자연의 이치인 상전이와 창발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이 거짓말 같았는데 지금을 견디면 나아진다는 소리를 믿기 힘들었는데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듯 상전이하고 창발 한다는 사실은 어떤 희망이 된다. 필연적인 우연, 행운, 나아감, 성취. 인간의 단어로 표현되는 그런 말들이 창발의 결과일지 모른다. 지금 애쓰는 순간이 진척 없어 보이는 노력이 무엇을 만들지 무엇이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는 산소이며 물이고 물이며 얼음이고 얼음이며 수증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