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이 말하는『반성의 목적』
연전(年前)에 자신은 뒤끝이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에 비하여 뒤끝(?)이 있어 보이는 나는 내 자신이 옹졸한 것인지에 대해 반문해 보았지만, 결국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그 사람이 말하는 ‘뒤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어떠한 일이든지 오래 기억하지 않고 털어낸다는 뜻인가? 좀더 면밀하게 표현하여, 자신이 남에게 가한 손해 혹은 남에게 받은 피해에 대해 괘념치 않는다는 말인가? 분명 그 사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진취적인 자세를 지녔을 것이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21세기형 실학자의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다. 지질한 감정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살아가는 변증법형 지성인의 가치를 좇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등의 명시로 익숙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승려인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은 『반성』(1936)이라는 그의 수필에서 일반과는 다른 가해와 피해에 대한 관점을 보인다. 즉, 해를 가한 행위의 불법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상대방이 해를 가하게끔 유도한(?) 피해자의 무능력과 약함을 불법행위의 주 원인으로 삼는 것이다. 유사한 가치관은 중국의 대문호 루쉰(1881-1936)의 『아큐정전(1923)』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20세기 초 서양 열강들에게 유린당하던 청나라를 소설 속 ‘아큐(Q)’라는 한심한 주인공에 비유한 것은, 루쉰이 중국 민족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계몽적 자기반성이었다.
이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중국 청나라는 강대국의 위치에서 흔들린 것이었지만, 조선은 이미 위태로운지 오래였고, 고질화 되었다는 것이다. 만해는 불교의 승려답게, 모든 현상의 원인을 외부에서보다 나 자신에게서 찾는, 다시 말해 자기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만해에게 조선은 모순 덩어리, 패역한 친일주의자들, 무지 몽매한 민족으로 여겨져 외부 세력은 차치하더라도 내부청소가 우선 시급하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1874-1965)’은 ‘평화는 강자의 특권이다. 약자에게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라고 하였다.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은 ‘약육강식’이란 제목의, 평시에 내재율이었던 시를 하루아침에 외형률로 바꾸어 놓기에, 다소 극단으로 느껴지는 위 처칠의 언급은 이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관을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치열하고 냉정한 ‘현실’이라는 세트장 위에 정립하는 것은 위험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인간은 단순히 다른 동물들보다 지능만이 월등하게 높은 것 외에는, 양심과 같은 윤리나 도덕도 ‘힘’의 하위 가치로 분석해버리는 A.I(인공지능) 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즉 인간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약육강식’을 외치며, 자본주의 시대에서 ‘돈이 곧 힘’이라는 진리로 우리를 노후까지 괴롭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사는 돈으로,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의외로 많다.
한용운 시대를 기준으로, 묘령(妙齡)의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배필을 선택함에 있어 두 남자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한 남자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오고, 장래가 촉망한, 미학적으로도 깔끔한 사람이다. 다른 남자는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하여 경성역(京城驛) 인근에서 인력거를 끌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세상의 일반적 가치라면 고민도 할 것 없이 전자의 남자를 택하겠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진 않은 것이, 만약 인력거를 끄는 남자가 비를 흠뻑 맞은 채, 개 떨듯이 떨며 여인에게 자신의 진심을 표시한다면, 여인의 선택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실제 우리들 가운데는 이들의 후손이 존재한다.
만해 한용운의 위와 같은 처절한 자기반성은 십분(十分) 이해할 수 있고, 상당부분 공감도 된다. 그렇다고 『더 글로리』 연진이의 잘못이 동은이의 연약함에 상쇄되거나 상계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연약함이나 잘못은 나 자신에게 미안할 수는 있어도, 타인의 양해를 구하여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던져볼 수 있다. 아니, 던지고 던지지 않고는 나의 선택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타인의 불법행위를 뒤끝 없이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피해자인 내가 멋진 것인지, 가해자인 나의 잘못을 피해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히 사죄하고 배상을 하는 것이 멋진 것인지... 그리고 이 양자의 순서는 어떻게 되는지...
당신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아래의 외침은 저주와 복수, 그리고 선전포고의 서막이 될 수도, 용서를 통해 과거를 떨치고 새로운 미래와 희망으로 나아가는 멋진 동은이가 될 수도 있다.
누구의 이름을 넣을 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