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Jean Grenier)의 비일상적인『일상적 삶』
알베르 까뮈(1913-1960)가 ‘나의 스승이자 나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말했던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1971)는 시적인 명상과 묘사, 철학적 반성, 그리고 풍부한 서정으로 가득 찬 그의 에세이 『일상적 삶』에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다각적인 사유를 자신있게, 아니 다소 오만하게 이곳 저곳 떨구는데, 이는 마치 헨젤과 그레텔(Hänsel und Gretel)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표시하기 위해 빵조각을 군데군데 떨어뜨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독자들은 이 빵을 줍느라 정신이 없게 되고, 힘겹지만 자신이 빵을 빠짐없이 주웠다는 성취감에만 집중하다가 책의 마지막 장을 맞이하게 되기 일쑤이다. 장 그르니에는 글의 서두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일상‘에 대한 개관(槪觀)을 아래와 같이 하기에,
라는 오빠 헨젤의 친절한(?) 안내를 우리는 이미 들은 셈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잠을 자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고독·침묵·비밀 등에 의해서 그들로부터 유리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와 존재방법들은 각각 우리들이 의식하고 있는 표면적인 목표를 벗어나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에 대한 분석은 일상생활에서 삶의 스타일과 심지어 예술작품 자체에까지 이르는 느껴질 수 없는 통로를 드러내 준다.
까뮈보다 15년 일찍 태어난 장 그르니에는 서른두 살이 되던 1930년 알제의 철학반에서 열일곱 소년 카뮈를 만나는데,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47세에 죽을 때까지 그와 교류하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이 흔히 떠올리는 일반적인 사제지간이 아니었다는 것은 장 그르니에가 ‘특별했던’ 그의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친애하는 카뮈,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새해를 시작합니다. 당신의 편지가 유난히 마음에 와 닿았어요. 당신은 언제나 내게 변함없는 우정의 증표를 보여주어 나를 자꾸 놀라게 합니다. 내가 그런 우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인쇄되어 나온 당신의 서문을 다시 읽지 않은 것은, 분에 넘친 찬사일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게 신세진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나를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나이가 아주 어렸었다는 이유 바로 그것밖에 없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이미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요! 나의 생각이 당신과는 다르다 해도, 내가 당신에 대하여 느끼는 깊은 우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까뮈의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떠나지 않는 그르니에를 역시 까뮈와 분리하여 볼 수가 없는 것은, 까뮈와 사르트르를 도저히 각기 생각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그르니에는 까뮈를 온순한 양으로 길들였음에 반해, 사르트르는 까뮈를 펄펄 뛰는 야생마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까뮈가 그의 작품 『결혼·여름』에서 사유(思惟)라는 쓸쓸한 벌판 가운데 짧은 반지름의 맴을 돌았다면, 그르니에는 『일상적 삶』이라 이름하는 벌판에서 좀더 긴 반지름의 맴을 좀더 천천히 돌았다고 볼 수 있다. 그르니에는 이 글에서 열두 가지 테마, 즉 여행, 산책, 술,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기, 정오, 자정에 대해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선 자신만의 함의를 아파트와 같은 집합건물의 구분소유와 같이 정리하여 분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책’에 대해 강제에 의한 산책, 이성에 의한 산책, 사회성에 의한 산책, 철학적인 산책 등 논리가 결여된 비유와 은유가 범벅된 근거들만을 통해 규정하는 것인데, 때로는 논거로서 역사적 사실과 문학작품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그르니에는 까뮈, 사르트르와 함께 설국열차를 운행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빈민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인 커티스가 까뮈에 해당하고, 커티스의 정신적 지주인 길리엄이 그르니에, 열차를 통제하는 절대권력자 윌포드는 사르트르가 될 수 있다. 영화에서 양극의 적대관계로 모두가 확신했었던 길리엄과 윌포드가 결국 동일한 본질의 인물이었던 것과 같이, 그르니에와 사르트르 또한 서로 실존의 형태만이 다를 뿐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그리고 길리엄과 윌포드가 주인공 커티스를 탄생시켰듯이, 어머니 그르니에와 아버지 사르트르는 까뮈를 성장시켰다.
『일상적 삶』은 일상의 요소들을 비일상의 그것으로 치환하거나 세분화하여 해석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하기에, 우리는 그르니에가 일상에서 ‘특별함’을 도출하였다고 오해를 하기가 쉽다. 우월함이라는 양념을 입힌 희소성의 가치를 표방하는 특별함과는 달리,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암시한다. 한편 까뮈는 『이방인』에서 이 ‘일반적이지 않다’를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시범하였다. 다중과 흐름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정죄되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까뮈는 사형을 앞둔 뫼르소의 독백으로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르니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를 일상에서의 원심분리기를 통해 추출함으로써 필요 이상의 사유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행은 의도적인 행위로서 그 성격은 실체로서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행의 시작과 끝은 폐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의 종료는 여행의 죽음을 초래한다. 이것은 나무를 태우고 있는 불이 스스로 소멸하며, 논쟁적 성격의 추론이 직관이 개입할 때 그 존재이유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필자는 설국열차를 운행하는 까뮈, 그르니에, 사르트르의 열기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을 제안한다. 열차 밖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한파의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들의 비일상적인 열기와 가까워지고 싶겠지만, 그르니에는 까뮈에게 보내는 아래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함으로써 자신도 열차의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요즘 나는 또한 오늘날의 회화운동에 점점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특히 그 운동이 보여주는 불확실성과 우연성 때문에 흥미를 느끼는 겁니다.
장 그르니에는 까뮈가 사망한 지 8년이 지난 후에 『일상적 삶』을 출판했으며, 그로부터 3년 뒤 세상을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