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배우는 지방 수령의 품격
‘목민관(牧民官)’은 백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스리는 지방 고을의 수령을 의미한다. 흔히들 ‘사또’와 유사하다고 하는데,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심서(心書)’는 ‘마음의 글’ 내지는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라고 직역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침서’로 의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에 살펴볼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 마찬가지로 전국민이 익히 알고는 있으나 실제 완독한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명저다. 정약용의 3대 저서로는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체계상 부임(赴任)·율기(律己 :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 관원을 면직함) 등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었고,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져 총 72조의 편제를 갖추고 있다. 제1편부터 제4편까지는 목민관의 임명부터 역할분담 등 기본자세에 대해, 제5편부터 제10편까지는 실천 사항에 대하여, 마지막 진황과 해관편은 빈민구제를 위한 정책과 임기만료로 고을을 떠나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여 전반적으로 목민관의 임명부터 해임까지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한창 도포를 휘날리며 조정에서 일할 나이인 30대 후반부터 약 19년간 경상도 장기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에게 지방의 수령은 초등학생 1학년 머릿속을 꿰뚫듯 그들의 행정실무와 마음가짐에 대해 투시하고 싶지 않아도 다 보이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다산 자신도 한때 지방 목민관이었고, 아마도 암행어사로 활동하던 시절이나 유배지에서 보고 들은 풍문으로 지방의 수령이나 관리의 실정(失政)과 부정부패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이미 그들의 속마음과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알았기에 모든 폐단의 원인이 바로 ‘마음’에 있음을 알았고, 그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어떠한 재능이나 노력도 무의미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특히나 이 글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마칠 무렵에 완성되어 그의 학문적 완숙도가 최고 경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산은 위에서 목민관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제가(齊家)’를 들 수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수령의 자리는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에, 백성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가정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공직자의 배우자나 자녀에게 법적·도덕적 흠결이 심각하다면 우선 다산이 말하는 목민관의 자격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위와 같이 다산은 애민(愛民)과 더불어 청렴 및 부정부패에 대한 경계를 지방 수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고 있으며, 이는 더 설명이 필요없는 목민심서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 조정은 정약용의 윤리관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산은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는데,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이 빵 하나를 훔쳐 19년 옥살이를 했다면, 정약용은 이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에 대한 비리 고발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귀양의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금지한 천주교를 가까이한 것이었다. 당시 서용보(1757~1824)는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자리에 오르는데 복수심으로 인해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히고 만다.
마지막으로 다산이 그의 주특기인 근검·절약에 따른 절용(節用)정신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요즘처럼 나 자신의 돈이라도 ‘우선 쓰고보자’라는 가치관이 MZ 세대를 필두로 하여 시나브로 확산하는 가운데 다산의 절용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물론 쓰지 않고 아끼기만 해서도 현명한 소비생활이 될 수 없는 경제구조의 오늘날이지만, 국민의 세금을 꼭 필요한 곳에만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공무원의 기본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 또한 언론에서 들려오는 수백억, 수천억의 배임·횡령 등 대부분의 재정비리에서 국민의 세금이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다산이 목민심서를 통해 우리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목민관은 ‘목민(牧民)’이라는 용어 자체가 ‘백성을 기른다’라는 비민주적인 의미이고, 이 목민관이 당시의 입법, 행정, 사법권을 모두 담당하여 오늘날의 공무원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목민심서』는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과 정치인들에게, 정약용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문학인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공무원 윤리지침서’가 될 수도 있고, ‘공무원 행정실무 설명서’로 보이기도 하는 이 책은 비단 윤리서 내지 지침서의 성격 외에도 다산의 기분이나 생각, 가치관이 산속에 숨겨놓은 보물처럼 힐끗 보이기에 수필의 면모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고위 공직자라 하면, 청렴·결백하고 진실한 관리보다는 ‘관리 나으리’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에 유감을 표하며 창 밖 감나무에 달려있는 언 감 하나를 초점없이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