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위해 써내려간 유일신의 분노와 눈물, 그리고 사랑
인류의 베스트셀러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이라는 본래의 정체 외에도 교훈을 주는 격언집 내지 삶의 지혜를 배우는 처세서의 면모를 흘리는데, 사실 이 책은 한 편 혹은 여러 편으로 이루어진 위대하고 거대한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가 없는 영(靈)적인 존재이기에 작가는 선택된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음성을 대필(代筆)하게 하였고, 수천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작가의 진의가 왜곡되지 않고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영, 즉 성령(Holy Spirit)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애굽기 31장 18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신명기 9장 10절 中>
물론 위 성경구절과 같이 작가는 육체가 없을 지라도 십계명을 종이도 아닌 돌판에 새겨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뜻을 전하였던 이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성경이라 불리우는 고전 수필은, 마치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하였지만 그 총괄을 세종이 담당한 것과 같이, 직접 기술한 주체는 인간이지만 사실상 신(神)인 작가가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책은 구약(The Old testament)과 신약(The New testament)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다시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예수(Jesus)의 탄생과 사역이 주된 내용인 신약의 마지막 편을 요한계시록으로 장식하고 있다. 성경은 문학적으로 비유와 상징이 풍부하다 못해 지나치기까지 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비유와 상징은 종교인들의 다의적인 경전해석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만들어 사이비(似而非) 혹은 이단(異端)이라 불리우는 미운오리 새끼를 양산하였는데, 백조와 미운오리를 판별하는 주체와 그 기준에 대한 검증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경은 시편과 같은 시(詩)의 장르도 있고,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등과 같이 모두 12권으로 이루어진 역사기록도 있고, 위에서 언급한 요한계시록처럼 묵시록(黙示錄)의 성격을 가지기도 하여 여러 색상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무지개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편협되거나 일률적인 관점은 물론 유동적 혹은 입체적 해석으로도 오해의 여지가 매우 큰 조심스러운 수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수필을 반복적으로 음미하여 읽어보면 총 66권의 저자들이 다양하고 쓰여진 시기에도 큰 편차가 있음에도 곧게 뻗어나간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창조주인 작가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박히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3일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가 머지않아 다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예수’라는 구원과 생명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기 때문에 이 수필을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겠지만, 다음의 내용은 필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롭고 인상 깊었던 부분이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6장 5~7절>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상 15장 10~11절 中>
우리는 보통 ‘신(神)’이라 하면, 평정심을 가지고 어떠한 상황이나 장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분노와 놀람, 질투, 후회, 애통과 같은 지극히 미성숙해 보이는 인간들이 시도때도 없이 반복하는 감정에의 기복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모두 무표정으로 수렴해가는데 이러한 포커 페이스(poker face)는 사람들 사이에선 흔히 고수(高手)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작가가 인류를 창조한 것과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며 안타까워하는 위 모습은 우리가 그동안 하여왔던 후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작가는 고수인 척 하는 지긋하고 점잖은 사람보다는 5세 아이들처럼 감정표현이 풍부한 쪽에 가까워 보이지 않는가?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기 2장 3절>
구약의 욥기에서는 작가 스스로 사탄의 충동으로 인해 이유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욥에게 해를 가했다고 자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 떠올리는 전능하고 완벽한 신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짐을 느낄 수 있게 된다.(그렇다고 작가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 (중략)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18장 23~32절 中>
위 장면은 부패한 고대 도시 소돔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작가에게 아브라함이 소돔에 사는 의인의 숫자를 조건으로 흥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브라함은 의인 오십 명이라는, 처음에 본인이 제시한 조건에서 다섯 명씩 깎다가 나중에는 용기를 얻었는지 사십 명 부터는 열 명 단위로 깎아 결국 열 명까지 성공하고야 말았다. 사실 아브라함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작가 또한 소돔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그 애타는 마음을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아브라함의 무리한 요구에 걸어본 것이었다.
이 밖에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작가의 모습을 성경이라는 수필의 군데군데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WHO I AM)’라고 명확히 밝히어 책의 작가소개를 일찌감치 마무리 지은 것도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수필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성경이 수필에 해당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굳이 기독교와 연계하지 않더라도 이 수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학기법과 표현의 정수(精髓)이기에 문학을 사랑하는 이라면 반드시 접해야 하는 필독서로 소개하고 싶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작품에 대해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하며 전체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