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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Oct 27. 2022

엘리펀트를 위하여

연암 박지원의 코끼리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는 엘리트의 역설

 필자도 대학 강단에 매일 오르는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수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또래의 교수를 상기(想起)시켜 본다. 그는 명문대에서 수학을 하고 일찌감치 교수가 된 소위 엘리트로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 개인적으로 존경도 하며 사랑도 하는 인물일진대, 하지만 딱 하나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라는 그의 역설적인 자신감이다.           


대략 이런 식이다.  결과적으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결코 반갑지가 않다.

 

 만일 진기하고 괴이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볼 요량이면 먼저 선무문 안으로 가서 코끼리 우리를 구경하면 될 것이다. 내가 연경에서 본 코끼리는 열여섯 마리였는데 모두 쇠사슬로 발이 묶여 움직이는 모양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열하 행궁 서쪽에서 코끼리 두 마리를 보니, 온몸을 꿈틀거리며 가는 것이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 실로 굉장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정조 4년, 청나라 가는 사신을 따라가서 쓴 기행문인 열하일기에서 코끼리를 본 경험을 『상기(象記)』라는 ‘기(記)’를 통해 묘사와 문답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 연암은 코끼리의 모습에서 받은 충격과 놀람을 자못 사람들에 대한 훈계로 승화시키려는 듯, 어색한 논증을 무리하게 진행하고 마는데 이는 마치 위에서 언급한 나의 반가운 지인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야, 사람들은 세상의 사물 중에 터럭만 한 작은 것이라도 하늘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하늘이 어찌 하나하나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로 말하자면 천이요, 성정으로 말하자면 건이며,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상재요, 오묘한 작용으로 말하자면 신이라 하니, 그 이름도 다양하고 일컫는 것도 제각기이다. 또 이와 기를 화로와 풀무로 삼고, 만물을 두루 펴내는 것을 조물이라고 하니, 이는 하늘을 마치 솜씨 좋은 장인으로 보고서 그가 망치와 끌, 도끼와 칼 등으로 조금도 쉬지 않고 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글은 보통의 사람들이 조물주를 상정하여 만물의 ‘이치(理致)’를 논하는 태도를 비판하려는 것으로, 획일적 이치로 만물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을 경계하고 있다. 연암은 “그대들이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 말, 닭,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라고 하며 실학자답게 귀납추론에의 오류를 적시하고 있는데 사실 풍선의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부풀어오르는 ‘풍선효과’에서 다른 한쪽을 보지 못한 사람마냥 성급한 일반화로써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연암은 논리적·과학적으로 증명과 검증이 가능한 것만을 사실 내지 진리로 보았는데, 이는 일종의 직업병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차라리 코끼리의 어금니를 없애고 코를 짧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조물주의 설계도 위에 펜을 올려놓는 과감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박지원이 그의 단편소설 『양반전』에서 지배층인 양반의 허례허식과 위선, 그리고 무능력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연암 자신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그는 타협을 모르고 호불호가 명확하여 주변 사람들과 쉽게 융화하지 못하였으며 여러 학문에 관심이 많아 공부만 하였기에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였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조선 후기의 엘리트 학자 박지원의 명성에 흠을 내는 목소리만 낸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박지원의 골계미(滑稽美)와 우울증 극복의 과정으로 넘어가 보련다. 

 박지원은 17~18세에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게 되는데,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그는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유머와 역설이었는데 『호질(虎叱)』과 같은 작품들에서 익살과 풍자로써 인물들을 희화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용후생학파 내지 중상학파라고도 불리우는 청나라 유학파인 ‘북학파(北學派)’의 핵심멤버로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박지원에게 필요한 것은 논리력과 분석력이 아니라 여유와 자유분방함이었다. 그는 아쉽게도 『상기』에서만큼은 이러한 여유와 창의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일진대, 하물며 만물과 하늘의 영역에 논리와 지성을 끼워넣으랴. 연암은 이 점을 지적하였고, 또 반대로 그 지적을 지적받는 운명에 놓인 것은 그에게 ‘펀(fun)’이 없기 때문이리라. 엘리트 보다 ‘엘리펀(fun)트’가 좋은 것은 모든 상황과 사람에 대해 월등한 능력으로 규정하는 엘리트의 그 삶이 결국 우울과 침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코끼리 이야기는 집 안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집 밖에서는 갸우뚱 거릴 수밖에 없는 논증에 가깝다. 하늘의 이치에 관한 통념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 순간 바로 연암은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자신도 이 상황에 어리둥절해지는 입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연암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아마 필자가 아는 그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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