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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Sep 27. 2022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그 욕망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라

알베르 까뮈의 『결혼·여름』에 나타난 사랑, 예찬, 그리고 반항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아니, 처음 느껴본다고 해야겠지... 조부모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을 질투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망자(亡者)에 대한 질투는 과거와 소통을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기도 하겠지만, 물 마시고 체하면 약도 없는 것처럼 명징(明澄)한 돌파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알베르 까뮈(1913~1960)는 그의 산문집 <결혼·여름>에서 줄리엣을 눈앞에 둔 로미오가 된다. 과감하고도 감미로운 키스를 쉴새 없이 퍼부으며, 수려함으로 압축된 독백이라는 속삭임을 독자의 의식 속에 주입하여 이미 준수한 로미오에게 매료된 줄리엣이 된 우리를 온전히 정복하는 것까지 성공하고 말았다. 머리속으로는 NO! 를 외치지만, 그의 박력에 로미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솔직함으로 무장된 그의 남성성은 줄리엣, 아니 우리의 그 어떤 반항도 허용하지 않는 듯 하다.     

 지난 글에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적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까뮈의 숨은 욕망을 빈 땅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아두고 이곳저곳 살펴보는 것으로 호기심을 풀어보려고 한다.


 까뮈는 ‘여자’와 ‘죽음’을 언제나 주요 탐구대상으로 설정하고 이따금씩 여자는 성적인 파트너로서의 대상으로, 죽음은 (심지어 자살까지)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을 보였는데, 역시 <결혼·여름>에서도 육체와 욕망으로, 젊음과 일생으로 이들은 변신하여 재창조 된다. 사실 ‘결혼’이라는 제목과 글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굳이 대상을 놓고 본다면, 이 결혼의 대상이 이성이 아닌 ‘자연’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흥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결혼’을 간과하며 이 글을 읽는 것이 까뮈의 자기논증에 더욱 가까워지는 방법일지 모르겠다. 까뮈는 자문자답을 통하기도 하고, 두 번 전진에 이은 일보 후퇴의 방식으로 그의 기분과 느낌을, 생각과 사상을 증명해나가는 것을 볼 때 과학적 가설을 끊임없이 설정해 놓아가는 괴팍한 발명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 핀 철 늦은 작은 장미꽃송이들로부터 피렌체의 그 아침 나절에 만났던 엷은 옷 속에 젖가슴이 자유롭고 입술이 촉촉한 여인들에 이르는 하나의 진실 말이다. 그 일요일, 각 성당마다 한 구석에 풍만하고 반짝이는 꽃들이 물을 머금은 채 진열대에 자욱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거기서 일종의 ‘순진함’과 동시에 어떤 보상을 발견했다. 그 꽃들 속에서나 그 여인들 속에서나 다같이 어떤 너그러운 풍만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에 욕망을 가지는 것이 다른 한쪽에 탐욕을 느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좁은 문>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앙드레 지드(1869~1951)는 까뮈와 유사한 속성을 가졌으면서도 대조에 가까운 삶의 태도를 지닌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청교도 교육을 받아서인지 금욕주의나 신학의 언저리를 항상 헤매곤 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금욕은 동성애로 전이되었으며, 그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신을 버리고 말았다. 한편 지드가 194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10년 후 까뮈가 같은 상을 받게 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도 문학의 황금기를 꽃피웠던 프랑스 문학의 균질성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와 같은 거장(巨匠)의 문학으로 대표되는 영국과 독일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모든 세기에 걸쳐 수준높은 작가의 작품들이 꾸준했기에 프랑스 문학가들은 선후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세대간의 사다리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악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같이 까뮈는 당시의 문학계 선배인 앙드레 지드를 언제나 의식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는 발돋움판으로 지드의 모든 것을 이용했다. (까뮈는 단정적인 표현을 주로 하기에 까뮈의 생각은 곧 주장이 된다)           



지드가 육체를 찬양하는 방식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좀 우습게 들릴까? 
지드는 육체가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그 욕망이 더욱 예민해지는 것을 원한다.          



  <결혼·여름>을 비롯한 까뮈의 여러 작품들은 그의 일생으로 상호 치환될 수 있다. 이는 비단 까뮈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작가들의 작품에서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수치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고, 축구선수의 꿈을 접게 한 폐결핵은 그를 그라운드가 아닌 사유(思惟)라는 쓸쓸한 벌판에서 짧은 반지름의 맴을 돌게 하였다. <결혼·여름>은 바로 까뮈의 ‘맴’이다. 한 자리에서만 맴을 돌고 있지만, 어느새 맴의 자리가 저만치로 옮겨졌음을 뒤늦게야 알 수 있다. 까뮈는 자신도 향방을 모른 채 단지 맴에 몸을 맡겼을 것이다. 즉, 까뮈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맴이 까뮈를 예인(曳引)한 것이니, 그는 단지 부선(艀船)과 다름이 없다.



 자정에 해안에 홀로. 아직 더 기다릴 것, 그리고 나는 떠나리라. 마치 바로 이 시간에 전 세계에서 항구들의 어두운 물을 비추는 불들로 뒤덮인 저 상선들처럼, 하늘 그 자체가 저 모든 별들과 더불어 멎어 있다. 공간과 침묵이 똑같은 무게로 가슴을 누른다. 어느 갑작스러운 사랑, 어느 위대한 작품, 결정적인 행위, 변모를 가져다주는 사상은 어떤 순간 억누를 수 없는 매혹에 겹쳐 바로 그런 견딜 수 없는 불안을 갖다 준다. 존재의 감미로운 고뇌, 그 이름을 알지 못할 위험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절묘한 느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인가? 다시금, 끊임없이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결혼·여름>에서의 각 글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어떤 연결성이라든가 공통성이 있지는 않다. 묘사와 서사(敍事)가 자주 사용되긴 하였지만, 이 글은 결국 까뮈의 독백, 맴일 뿐이다. 바바리 코트 주머니에 왼손을 찔러놓고, 아마 오른손으로는 담배를 피우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슨 말을 중얼거리며 제자리를 돌았는지는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까뮈는 자신에게 솔직했고(혹자는 본능에 충실했다고 표현한다), 여자와 죽음을 사랑하였다. 자연과 죽음을 예찬하였고, 세상과 사회에 반항하였다. 그에게는 사랑과 예찬, 그리고 반항이 삶의 이유이자 종착점이었다. 

 우리 또한 까뮈를 질투하지 않을 수 없다. 도저히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파멸을 꿈꾸고 원했던 그였기에 우리의 마음은 더욱 아프고 애틋하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넣었다.

                               그러니 나는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 앙드레 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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