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남에게 쓰는 박제가의 편지
예전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말을 재료로 하여 위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사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기본 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은 물론 친구관계, 직장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우리 삶에서 중추적인 부분을 차지하기에 인간관계가 어려우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돈이 많거나,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보다도 언제나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친구나 이웃이 옆에 있는 사람이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의 경우 안타깝게도 아직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일이 잘 풀리거나 작은 성취라도 하게되면 괜시리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동료나 후배들에게 충고를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성취는 필연적으로 오만과 과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비록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서 분출되는 페로몬의 흔적을 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성공이 교만과 질투와 같은 불가피한 부작용을 나타내는 것과 달리, 관계의 기쁨은 인류가 만든 어떤 약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으로 인정되는 혈압약과 같이 내성도 없고 우월감도 없다. 아쉽게도 이러한 관계의 기쁨을 거의 누리지 못했던 인물을 한 명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과 함께 종종 거론되는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5일 ~ 1805년 7월6일)는 20대 초반에 한 살 위의 처남 이몽직(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 절도사를 지낸 이관상(李觀祥)의 아들이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게 된다. 『답이몽직애(答李夢直哀)』라고 불리우는 글인데, 이 편지글에서 초정은 자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주변인들의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말라는 당부를 처남에게 하고 있다.
박제가는 실학자답게 기성의 관념과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언제나 변혁을 추구하는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여러 부류들과 어울리며 밖으로만 도는 생활로 난봉꾼의 이미지를 보였는지도 모른다. 선비였던 장인 이관상의 가풍을 고려하면 소극적인 것 같으면서도 집에 붙어있는 날이 없는 초정의 모습은 미덥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나 서자(庶子)로서의 한계를 가진 그였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울분이 도사리고 있었고, 사회적 소외감 속에서 내적인 갈등을 지속하였다. 그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 변소에 가면 그 옆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장성하여서는 사람 앞에서 수줍어하고 내성적이어서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내성적인 초정이 자기 스스로 ‘나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편지를 처남에게 보내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워낙 막역한 사이였던 이몽직마저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초정은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상대의 얼토당토 않은 거짓주장에 가만히만 있으면 사람들이 그 거짓주장을 진실로 여기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민사소송에서도, 결백하기에 떳떳하다고 하여 자신에게 송달된 소장에 아무 대응을 하지 않으면 결국 패소를 하는 것과 같이, 나에 대한 모함은 적절히 항변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했던 10명의 사람들 중 3명은 아무 이유없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마음을 바꾸어달라고 공을 들이는 것은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가 되기 쉽다. 초정과 같이 ‘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란 말야’라는 설득의 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에 이들에게는 무대응이 현명하겠지만, 정도가 심하여 허위의 사실로 음해를 한다면 최소한의 대처가 꼭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허위사실을 진실로 믿게 되기 때문이다. 박제가 또한 처남 이몽직에게 서운함과 항변을 담은 편지를 남겼기에 후대의 우리가 그의 진면목에 대해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초정은 혹여나 자신을 비방하는 자가 선의와 친분을 내세우며 비난을 합리화할 수 있어 다른 해석에의 여지를 위와 같이 남기지 않으려 한다. 초정은 단순히 진득한 모습이 없는 것만으로 과녁이 된 것은 아니다. 그가 속해있는 북학파(조선 후기 청나라의 문물과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주장한 학자들을 가리킨다. 주로 청나라를 다녀온 학자들로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으며 성리학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자체가 조선 후기사회에서 비주류였을 뿐만 아니라 북학파 안에서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과도한 변혁을 주창하였다. 청나라를 오가며 선진문물에 자극을 받은 그는 청나라의 모든 것을 똑같이, 심지어 변발(앞 머리털을 밀고 뒤 머리털만 남기고 땋는 몽골족과 만주족(여진족)의 머리매무새이다.)과 호복(‘오랑캐 옷’이라는 의미로, 청나라의 만주식 복식이다. 소매가 넓어 활동에 부적합한 우리의 한복과 달리 호복은 실용적이었다.) 마저 조선에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지나치게 솔직했던 탓일까? 용감한 비주류였던 그는 조선 전기 매월당 김시습의 쓸쓸한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유배를 마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짐으로써 안타까움만 남기고 만다.
이 밖에 박제가의 인생을 논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셨고, 추사 김정희가 그에게서 글과 그림을 배웠다고 하며,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라는 기록도 보인다. 어쨌거나 박제가에 대한 비방에 참예(參預)하였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처남 이몽직은 이 편지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산에 활을 쏘러 갔다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절명하고 만다.(연암 박지원은 '이몽직애사(李夢直哀辭)'에서 '대저 사람이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요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夫人一日之生, 可謂倖矣.)'라고 하였다.)
이유없는 비방과 이유없는 화살 사이에는 과연 어떠한 이유가 숨어 있을까?
그것이 바로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