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빚을 내서라도 가라
인생이 힘들거나 재미없을 때, 혹은 둘 다일 때 필자는 주저없이 여행을 권유한다. 알베르 까뮈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가 ‘장 그르니에’는 그의 산문집에서 ‘사람은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여행한다.’라고 하였다. 일상에서의 자신은 그 일상이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반복적인 행위만을 계속한다. 물론 그 계속적인 반복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일상을 위해 사는지, 혹은 일상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인지’ 전국시대의 고대 사상가인 장주(莊周, BC 369 ~ BC 289)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같이 ‘나’를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현상적·표면적 자아는 그대로이겠지만 본질적 자아를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만을 바라보고 일상대로만 생각한다면 말이다.
익명성에 자신감을 얻어 외국에서 더욱 과감해지는 젊은이들과 같이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일상을 떠나 청나라 여행길에 오르자, 조선의 성리학 틈새에서 맥을 못추던 자신의 사유(思惟)를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 연암은 청나라 고종의 칠순 잔치에 초대를 받아 청나라로 가는 여정을 『열하일기(熱河日記)』 로 편찬하였는데, 그 중에서 『통곡할 만한 자리』라는 기행문이자 고전수필을 이번에 소개하고자 한다.
연암은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통곡할 만한 자리’, 즉 좋은 울음터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화의 상대방인 정 진사(進士)는, 넓은 요동 벌판을 보며 예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는 연암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통념을 가진 평범한 사람에게, 우는 것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인데, 연암은 독창적인 발상과 인식으로 아래와 같이 통곡을 풀어내고 있다.
이는 허균의 『통곡헌기(慟哭軒記)』에서 말하는 칠정(七情) 중 슬픔에 대한 해석과는 다소 다른 것이다.
허균은 슬픔을 자아내는 사연도 복잡다단하다고 하여, 연암과는 달리 슬픔의 다양한 양상에 주목하고 있다.
박지원은 실리를 외면하고 예의와 명분만을 중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벗어나 광활한 요동 벌판에 이르자, 창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역발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도 일반적인 관점과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모두 일상을 떠난 여행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행은 현실의 문제를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문제를 문제가 아닌 것으로, 리스크를 리스크가 아닌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행은 우리를 명랑하고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여행을 좋아하고 자주 가는 사람치고 우울증이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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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행에는 평범한 우리를 비범하고 특별하게 변모시키는 힘이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인생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이사를 가서 사는 환경을 바꾸는 것, 교제하는 친구를 바꾸는 것, 마지막으로 즐겨 읽는 책을 바꾸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필자는 여기에 여행을 떠나는 것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즐거움과 추억은 여행만의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