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의 <남과 나> 칼럼을 읽고
한 주에 한 번, 혹은 달에 몇 번씩 글쓰기를 얼기설기 2년 여의 시간 동안 해오면서 쓴 가장 많은 주제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참 당연하게도 말이다. 글감으로 꺼내 쓰는 '나'는 늘 오랜 시간 속의 나다. 이건 꼭 써야만 하는 기억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붙잡힌 과거에 대해 쓰다 보면 갑자기 어딘가에 묻혀있던 기억들도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이런 일이 있었나 생각도 못했던 기억은 발목까지 붙잡고 말아 도저히 글로 쓰기 어려운 지경까지 마음을 깊고 깊은 시꺼먼 속으로 끌어내리곤 했다.
그런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부여잡고 썼다. 글을 잘 쓰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는 글을 매개로 만나 꾸준히 각자 쓴 글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료인 동시에 소중한 독자였다. 서로가 자발적인 독자가 되어 글을 읽고 열심히 피드백을 했다. 어떤 경험을 내놓든지 옳고 그름이나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다. 여러 동료들의 마음을 든든한 기둥 삼아 그렇게 나에 대해 많이 썼다. 다정한 친구의 초대로 100일간 매일 쓰는 프로젝트도 한 차례 수행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지겹다"는 한 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슬아 작가처럼 타인들에 관해 쓸 엄두를 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참고문헌 주석을 잔뜩 달아 근거를 마련해둘 수 있는 연구 논문 같은 게 아니고서는 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나는 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지겨워졌다는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방금 전에 요즘의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한 바닥을 썼다. 롤랑 바르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타인들을 말하는 것을 구조 활동이라고 했다던데, 나는 아직도 스스로에 대한 자기 구조 활동이 필요한 걸까?
안전한 독자, 동료들의 시선 바깥을 너머 글을 게시해보고 싶어 브런치 작가도 신청했고 어느 웹진에 투고도 해봤다. 이슬아 작가만큼의 영향력이나 유명세는 갖고 있지 않아 대체로 내 글엔 공감의 댓글이나 '좋아요'의 하트 표시가 주로 달린다. 사실은 욕먹지 않을 만큼의 글을 올리는 것도 있다. 내 이야기가 주된 글이므로 누군가의 동의나 공감이 구태여 필요하지 않은 글. 비판보다는 공감이 좀 더 얻기 쉬운 글. 내 브런치를 구독했다는 알림에, 좋아요가 눌렸다는 알림에, 블로그에 글 잘 읽는다는 댓글에 마음이 부푼다. 아직은 타인 중심적인 시선이 글을 올리는 마음에 있다. 그래서 나의 어느 부분이 좋다고 하면, 내 글의 어느 부분이 좋다고 하면 그걸 더 부풀리고 싶다. 그 모습으로 나를 좋게 본 사람들의 마음에 더 꼭 맞추고 싶다. 그러지 않고 싶은 마음과 그런 마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꼭 누군가가 읽어주어야만 글과 나 사이에, 남과 나 사이에 거리가 생기는 것은 아닐 테다. 그리고 누가 읽어주어야만 내가 글을 꾸준히 쓰려하는 행위에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서운한 감정을 잔뜩 토해내는 글을 직전에 써서 그런지 내가 너무 나와 유착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주 작은 보폭이라도 한 발짝은 떨어져 있을 수 있어 내가 무엇에 관해 서운한지를 글로 토해낼 수 있었던 거다. 그 마음을 토해내면서 결국은 나보다도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던 무의식적인 본능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더 마음에 들어 하고 싶어 한다는 걸.
그런 혼곤하고 분리가 잘 되지 않는 감정이 들 때마다, 그걸 분리해내서 종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