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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Dec 02. 2021

산산조각

다큐멘터리 <어느 일란성 세 쌍둥이의 재회>를 보고


서로가 셋이나 되는 쌍둥이의 일원인 걸 모른 채로 살다가 다시 만나게 된, 그 모든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어. 나는 그만 '재회'라는 키워드에 꽂히고 말았지 뭐야.


다큐멘터리 내용은 이래. 태어나자마자 각기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셋이 서로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무척 기쁘고 경이로운 사실인 양 보여줘. 나이가 제법 들어 머리가 희끄무레하고 주름이 늘어난 쌍둥이의 일원들도 눈을 반짝이며 서로의 존재를 처음 발견하게 되었던 때를 이야기 해.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공통점이 많았다고, 서로가 꼭 빼닮았다고.


거기서 나는 유전자로는 공통점이 없을 너를 떠올렸지. 뭐랄까, 나는 너와 깍지를 꼭 마주 낀 양손처럼 잘 맞는 사이라는 생각을 했어. 네 손가락 사이의 허공을 내 손가락으로 맞잡아 채워 온기를 잔잔하게 전할 수 있는 그런 사이 말이지. 마치 서로를 위해 각자의 손가락이 만들어진 것처럼. 


당시의 나는 자주 부서지는 내면을 단단한 외피로 둘러메는 요령이 제법 있었는데, 그걸 꿰뚫었던 너에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어. <수몰지구>라는 시의 구절을 인용해 그때의 기분을 설명하고 싶어.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그런데 유일하고 특별할 것이라 여겼던 마음은 별 것 아니었던가봐. 나의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이 되어 버렸지. 맞잡은 손가락 사이의 못 다 채운 빈틈을 메꿔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반지가 우리에게 있었잖아. 그 반지를 빼내고 돌아섰을 때 관계의 종말을 먼저 고했음에도 푹 꺼지는 네 고갯짓이 내 마음을 부수고 말았어. 


그러고는 꽤 오랜 시간을 깨진 마음의 유리 조각을 다시 이어 붙여야만 했어. 너는 나를 좋아한 게 아니고, 너를 좋아하는 나에게 아주 잠깐의 흥미만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생각이 겨우 이어 붙여둔 마음을 다시 박살내기도 했어. 그러고 남은 어떤 조각들은 잘게 가루가 되어 날아가 조각들 사이에 빈틈을 냈어. 틈은 쉽게 메워지지 않더라. 근데 그걸 구태여 메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어. 시인 정호승은 이렇게 말해.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이제는 그래서 그냥 그 조각들을 안고 살아. 다행히 시간은 가진 힘이 커서 조각의 모서리들을 둥그렇게 만들어 주었어. 근데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던 어떤 손길이나, 눈길, 마음 같은 것들이 간절할 때가 있어. 근데 그건 꼭 네가 아니어도 되겠더라고. 내가 가진 두 손을 서로 맞잡아 틈을 메꿀 수 있더라고. 그 손은 이제 기도를 하는 모양이 되어 나를 보듬어 주곤 해. 그래서 괜찮아. 애써서 부서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 둥글게 부서져 있는 채로 있는 거. 괜찮은 것 같아. 괜찮아.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전윤호, <수몰지구>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 정호승, <산산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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