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현 Apr 08. 2019

가난한 걸음과 맑은 눈으로

엄마와 미술관 산책하기

아름다움을 보려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마음이 가난하면 눈이 밝아지고 눈이 밝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된다.

/박상미 (나의 사적인 도시)


찌르르하게 봄을 느끼며 하루 종일 너무 날씨가 좋다는 말을 수십 번 내뱉었음은 그간의 길고 추웠던 겨울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어제 첫 목적지였던 요즘 서울에서 가장 핫하다는 커다란 한옥 카페- 아침 아홉시에도 외국인들이 와서 사진 찍고 자리 잡기 바쁜 그 장소에서 엄마는 어제 결혼식에서 만난 먼 친 적 아저씨 이야기를 제일 먼저 했다. 물 장사로 엄청난 돈을 벌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그런 분이었는데, 이번에 버닝 썬 같은 클럽을 새로 오픈하려고 오빠한테 일을 맡기려고 했다고 한다. 나는 버닝 썬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대놓고 범죄를 목적으로 한 가게를 하겠다는 건가' 싶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다행히도 사촌 오빠는 몇 번이나 칼같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 수많은 클럽 상호 중에 하필 버닝썬이라는 이름을 댄 건 최근 밝혀진 사태로 전 국민이 아는 이름이라 예를 들었을 뿐이라 치고, 범죄를 종용하는 곳은 아니고 그냥 일반 클럽이라고 쳐도,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나는 단박에 엄마한테 말했다. "더 이상 연락하고 지내지 마세요." 엄마는 자신도 어제 그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난 후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 엄마의 친 오빠에게 도움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가 성공한 그분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엄마의 오빠를 그리워하며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딸내미도 작업실이나 뭐든 필요하면 부담 가지지 말고 연락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난하고 가난한 나와 엄마는 그 제안이 기쁘지도 혹하지도 않았다. 엄마. 우리가 돈이 없지, 양심이 있고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지. 그런 돈도 그런 삶도 싫어.


 미련한 자존심이긴 하다. 뭐가 됐건 돈이 없으면 초라해지니까. 하지만 나는 가난했기에 노력했고 다른 가치를 찾아서 열심히 세상을 돌아다녔다. 내가 부잣집 딸이었다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내 책, 나의 여행, 그리운 여백이, 소중한 친구들, 분명 모두 없었겠지. 내게 아름다움이 주는 가치는 너무나 크다. 아름다운 것을 너무나 사랑한다. 예술가들의 삶과 땀으로 만들어낸 아름다운 작품과, 자연이 보여주는 계절의 증거들, 사람들의 웃음과 반짝이는 햇빛의 질감. 늘 행복할 수 없는 삶에 아름다움이 주는 크고 작은 기쁨. 그런 것들을 알기에 가난할지언정 아름답게 살고 싶다.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찾아온 봄의 골목을 걸으며 기분이 너무 좋다고, 날씨가 너무 좋다고 이야기했다. 엄마의 손을 꼭 잡아 이끌어 계속 사진을 남겼다. 엄마는 꽃보다 더 환하고 예쁘게 웃었고 엄마의 아름다움이 내게 기쁨을 줬다.


 같이 아라리오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을 수백 번 다닌 나지만 엄마와 미술관 산책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어딜 가나 너무 멋쟁이라는 말을 듣는 나의 엄마는 누가 봐도 예술 관련 직종일 것 같은 이미지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구 시대의 여자로 살아왔다. 미술관을 천천히 걸으며 오디오 가이드를 경청하고 백남준과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궁금해하는 엄마. 아라리오 미술관 외관을 보며 감탄하고 키스 해링의 설치품을 보며 새로움을 느끼는 엄마. 엄마는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났다. 기회와 자격을 얻지 못해 꺼내보이지 못했던 감정들을 60살이 넘어서야 가끔 딸에게만 내어 보인다. 내가 그랬다. 엄마, 인생 어찌 될지 누가 알아, 육십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르지.


엄마를 통해 가난을 받았고, 가난을 통해 아름다움을 알았고, 아름다움을 찾아 걸은 산책을 통해 엄마의 마음을 알았다. 편집샵에서 오만 원짜리 소서 세트를 한참 만지작거리는 엄마에게 선뜻 사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데, 집에 돌아와 자신의 사진을 보며 흐뭇해하는 엄마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_

2019 04 08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아침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