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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현 Apr 09. 2019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냥 하는 거지

 책을 네 권을 냈고, 사람들을 나를 작가라고 부르지만 나는 스스로 직업이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글을 써서 번 돈은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고 대단한 베스트셀러 한 권 없으며, 사인회를 한다고 찾아올 팬들도 없다. 그래도 글을 쓴다. 첫 책을 내기전에는 사람들을 놀래켜 주겠다느니, 입소문을 타고 백만 부가 팔릴지도 모른다느니, 세상 물정 모르고 들떠서 인생 역전을 꿈꿔본 적도 잠시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이제는 요행도 기적도 바라지 않고 그저 쓸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무척 진지하고, 그림 그리는 일보다 수백 배는 어렵다고 느낀다.


 책을 계속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문제는 책을 쓰는 건 너무.. 너무 어렵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건 당연하고, 무엇보다 무엇을 쓸지가 제일 어렵다. 한동안은 쓰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했거나 이미 쌓여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다듬는 과정만으로 책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뭔가 다른 걸 써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고 정말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 이후로는 글을 쓰는 게 더 어려워졌다.


 다섯 번째 책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는 한참 지났다. 사실 이미 계약이 되어있고 편집자와 미팅도 했었다. 그 주제는 4년 전에 떠올렸던 것인데, 그때 바로 쓰고 남겨서 1년 안에 출간을 했어야 했던, 그런 이야기였다. 내가 게으름 피우고 잠이나 처자고 생계를 이어나가기에 급급한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고 이제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것을 주목하고 있다. 내가 먼저 생각했어! 하는 게 쪽팔릴 만큼 관련 책들은 이미 여러 권이다. 많이 늦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꽤 여러 번 겪었다. 오, 이거구나! 하고 마음을 먹을 당시에는 아무도 관심 없던 것들이 1-2년 후에는 세상의 화두가 된다. 그 1-2년 사이에 차근차근 준비했더라면 나는 인생역전이라는 것을 반쯤이라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자랑이나 자만이 아니다. 부끄러움이고 후회다. 나태했던 인간의 찌질한 변명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쓰기가 꺼려졌고 다른 것을 쓰자, 다른 주제를 생각해보자.. 그렇게 지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쓰고 싶은 새로운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써내지 못한 것은 미련처럼 남기 마련이라, 자꾸 그쪽으로 밖에 생각이 굴러가지 않는 것이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도 자신감이 꽤 떨어진 나는 글은 쓰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책을 읽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글을 읽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써야 한다,라는 묵직한 두려움만이 가슴 한구석에서 돌덩이처럼 굳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잠을 설치는 중에 친구가 전화가 왔고 갑작스러운 술자리에 갔다. 친구들은 이미 술에 잔뜩 취해있었고, 진지한 대화 속에서 나는 한숨을 쉬며 썼어야 했는데, 쓸 걸 그랬어. 매번 이런 식이지 뭐.. 쿨한 척 웃었다. 밤을 새고 집에 돌아오는 아침의 택시 안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보야? 멍청이야? 장난쳐?

정신 차려, 그냥 써.


 사랑니를 뽑으려면 잇몸을 잘라 망치로 이빨을 깨서 조각조각을 내서 빼낸다고 한다. 작은 가루도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두텁게 굳은 나태한 삶을 찢어 갈라 돌덩이를 꺼내야 했다. 시간을 단번에 뒤집었다. 천천히 밤낮을 돌릴 여유 따위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180도 바꿨다. 몇 달 동안을 자고 싶으면 자고, 열 시간씩 자고 나서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SNS에 인생 몰까- 하면서 살다가, 지금은 매일 오전 다섯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있다.


오랜만에 하루키의 책을 꺼냈다. 이전에 노란 형광펜으로 그어놓은 구절.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도 매일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오전 시간 동안 글을 쓴다. 그를 따라 하려고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베개는 필요 없어, 네가 있으니까> 원고를 쓸 당시에 글도 너무 안 풀리고 우울해서 밤을 새우고 찾아간 카페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오전부터 오후 한시까지 한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읽고 고치는. 두 달 동안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글쓰기를 했었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힘든 일을 겪고, 그 생활을 완벽하게 잃었었다.)


 아직 8일째지만 조급하지 않게 글을 쓰고 있다. 수십 번을 지웠다 썼다, 자주 손을 멈추고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찾고, 막힌 글을 풀어내며 애를 쓴다. 문득문득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런 것들을 계속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천재도 위인도 아님을 깨달은 보통의 내가, 하루하루를 묵묵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의미임을.


 인생은 한 번에 바뀌지 않고, 로또 1등을 꿈꾸지만 오천 원도 되지 않는 것처럼 허망한 일들 투성이다. 그렇기에  마치 아무 희망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느리게 걷는다. 내 발이 움직이는지, 허리는 똑바로 펴고 있는지, 그런 것만 생각한다. 저 앞에 절벽이 있든 산이 있든 난 모르겠다. 그냥 안 볼래. 지금은 그냥, 걸을 뿐이다. 달리기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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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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