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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스토랑 Aug 16. 2023

나는 당신을 알 수 없는데 어찌 사랑을 합니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영화 <뷰티인사이드>에서는 매일 외모가 바뀌는 한 사람과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로맨스가 그려집니다.


애틋하게 사랑하지만 매일 다른 외모로 나타나는 연인을 바라보며 여자는 자신이 누구와 사랑을 하고 있는지 혼란 빠져 힘들어합니다.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상투적인 말을 가장 로맨틱하게 그려낸 <뷰티인사이드>의 이별신


그런 그녀를 위해 남자는 헤어짐을 선택하고,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 결국 멀리 떠나는 선택을 합니다.


시간이 흘러 여자는 매일 변하는 그의 외모가 아닌, 변하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찾아갑니다.


그렇게 영화는 '뷰티인사이드'라는 제목에 걸맞은 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본 이 영화가 지금까지 저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사랑의 속성을 정반대로 뒤집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영화에서는 "겉모습은 바뀌지만 동일한 내면을 가진 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는 문제가 제시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겉모습은 똑같지만 변화무쌍한 내면을 가진 인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정반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겉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며 조금씩 늙어가겠지만 언제든 그 사람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은 다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을 전부 알 수 없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는 안 맞는 것 같아",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너와 만나지 않았어",

"결혼하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거실에 앉아있더라니까요"


누군가를 오랫동안 사랑해 봤다면 이런 말들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절절하게 사랑해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잠들 때까지 하루종일 함께 있어도 한 인간은 다른 인간의 내면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타인의 내면을 전부 이해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문제에서부터 오늘 소개해드릴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하는 사랑은 시작합니다.




그 어떤 절절한 사랑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2가지 이유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년 7월 10일 ~ 1922년 11월 18일)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 사랑은 지독한 열병에 불과하며 현실 속 사랑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를 통해 사랑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2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사랑 우리의 눈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내가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어낸 환영을 사랑하죠.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모든 면이 특별해집니다.


그의 평범한 외모가 한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희미한 미소만 보아도 세상이 밝아지고, 별 뜻 없는 사소한 말들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랑의 콩깍지는 평범했던 사람을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사랑의 시선으로부터 한 사람은 아름다운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랑의 콩깍지는 언젠가 벗겨지고 맙니다.


시간이 흘러 익숙함이 자리 잡으면 내가 마음속에 품었던 사람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닫습니다.


그리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처음부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죠.


프루스트에 따르면 나와 타인 사이에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좁힐 수 없는 인식의 틈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죠.


우리는 사랑으로 인해 왜곡된 눈으로 연인을 바라보고 그 사람 역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연인에게 보고 주고 싶은 모습만을 골라 보여주려 합니다.


또 나라는 사람을 상대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이다 보면 결국 실제 나와는 다른, '내가 만들어낸 이상화된 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사랑은 왜곡된 눈으로 서로의 왜곡된 모습을 바라보며 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뜨거웠던 사랑의 감정이 식으면 자신이 그 사람을 그 자체로 사랑한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을 투영해 사랑해 왔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커플에게 찾아오는 이 시련은 많은 경우 사랑을 실패로 이끌죠.


모든 사랑의 결말이 실패로 정해지는 두 번째 이유는 때때로 우리가 연인을 완전히 소유했다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연인 사이의 소통은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색안경을 끼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도 없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볼 수도 없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시간은 "이 사람은 나의 소유이며 나는 그의 모든 걸 알고 있다"라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고, 모르는 걸 알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이미 가진 것,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죠.


"나는 저 사람을 소유하고 있다"라는 착각으로부터 자리 잡은 권태감은 상대를 더 알아보고자 하는 의욕을 사그라뜨리고, 연인에게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모습이 있을 거란 상상력을 제한합니다.


권태는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던 상대를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며 "이 사람도 큰 차이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이 역시 사랑을 실패로 이끌죠.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인식의 틈이 존재한다는 기본 조건에서부터 사랑은 두 갈래의 결말로 향합니다.


하나는 "알고 보니까 나랑 안 맞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이 이렇게 변할 줄 몰랐지"로 끝나는 결말이고, 다른 하나는 "연애가 다 똑같지 뭐", "그놈이 그놈이야"로 끝나는 결말이죠.


이렇듯 프루스트는 자신의 소설에서 사랑에 관한 비관적인 시선을 자주 드러내는데요.


그렇다면 프루스트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을까요?


그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사랑, 예술에서 찾으라




프루스트에 따르면 우리가 상상 속으로 지어낸 허상의 존재가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보다 더 실재적일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은 내가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데 반해 상상으로 만들어낸 존재는 얼마든지 내가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준수한 외모와 따듯한 마음씨 그리고 현명함을 갖춘 사람이 나의 이상형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현실 속의 한 사람을 내 이상형에 맞게 바꿀 순 없습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그 사람은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을지언정 그는 원리적으로 내가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이죠.


따라서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누군가를 바꾸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합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의 이상형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바꿀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만나는 이는 나의 외부에 있지만 내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을 나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죠.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이든 내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의 존재든 어차피 내 생각으로 덧씌워진 모습으로 밖에 볼 수 없다면, 차리리 내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허상의 존재가 현실의 사람보다 더 실재적일 수 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라는 현실 세계와 달리 소설의 세계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깊숙한 내면까지 모두 다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나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그 인물들을 재구성하며 이해의 공백을 모두 매울 수 있죠.


소설에서 만나는 인물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사람들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측면에서 프루스트는 진정한 사랑은 현실이 아니라 예술의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상대를 발가벗겨 모든 걸 알 수 있어야만

진정한 사랑일까?




프루스트의 사랑에서는 '진짜'에 대한 강박이 엿보입니다.


그처럼 엄격하게 '진짜'를 따져 는 건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지나쳐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생을 같이 살아도 이 사람을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부부들의 증언을 떠올려 본다면, 프루스트가 말하는 사랑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그렇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생각 듭니다.


어떠신가요, 그가 말하는 사랑에 공감이 되시나요?


마지막으로 프루스트의 사랑을 우리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한 불문학자의 의견과 제 의견을 덧붙이며 이번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원로 불문학자 (故)정명환 교수는 프루스트가 말하는 사랑이 "나는 옷 입고 너는 벌거벗겨서 너를 내가 완전히 소유하겠다"라는 자기중심적 사랑이라 평가합니다.


프루스트의 소설 속의 남자는 항상 불안에 빠집니다.


여자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데, 몸은 어떻게 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내 것이 됐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이 노학자는 상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프루스트식의 자기중심적 사랑의 반대편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인간은 "어떤 사랑이 진실한 사랑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갖지 않고도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죠.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상대를 완전히 내 소유로 두고 싶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내어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서로를 소유하려는 욕망의 부딪침만이 아니라 서로를 내어주려는 자기희생의 조화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죠.





예견된 실패를 딛고 시작하는 사랑에 대하여



이제 프루스트가 보는 사랑에 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프루스트가 보는 사랑의 타임라인은 언제나 사랑의 시작으로부터 출발해 사랑의 실패로 향합니다.


그는 이 타임라인을 반복해 보여주며 결국 모든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하지만 사랑의 타임라인이 무조건 사랑의 시작에서 출발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의 실패로 출발해 사랑의 시작으로 향할 수도 있죠.

  

저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예견된 실패를 딛고서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너를 알 수 없고 언젠가 우리의 사랑도 실패로 끝나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사랑의 실패를 감내하겠다는 각오로부터 시작한 사랑에 더 이상의 실패는 없으니까요.


프루스트가 보는 사랑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 )


자유로운 생각을 댓글로 많이 남겨주세요.


오늘 내용과 관련해서 "사랑도 배우고 익혀야 하는 하나의 기술이다"라고 말했던 에리히 프롬의 논의가 궁금하신 분은 아래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치고 저는 다음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북스토랑이었습니다.



<참고문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역, 국일미디어, 2022

[왜 살아야 하는가], 미하엘 하우스켈러, 김재경 역, 청림출판, 2022

[프루스트를 읽다], 정명환, 현대문학,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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