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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필은 Feb 24. 2024

욕망의 ‘나’에서 공감의 ‘너와 나’로

영화 <너와 나> 리뷰

세미는 교실에서 낮잠을 자다가 불길한 꿈을 꾸고 깨어난다.

1. 보편성의 코드와 특수성의 코드 사이에서

평온한 일상 속에서 죽음의 징조를 발견하는 것은 부조리의 불안을 낳는다. 영화 <너와 나>가 시작되는 장면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위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해 보이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교실에서 엎드려 자던 주인공 세미는 불길한 꿈을 꾸고 깨어난다. 꿈의 내용은 영화 중반부에서 밝혀지지만, 미리 말하자면 세미의 단짝인 하은이 풀밭에 누워 죽어 있는 꿈이다. 이후 세미는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던 중 화단에 죽어 있는 새를 발견한다. 하은이 죽어 있는 꿈과 새가 죽어 있는 현실. 세미는 꿈과 현실 양쪽에서 평온한 일상과 대비되는 죽음을 목격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건인 죽음이 보편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영화는 곧바로 특수성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자전거에 치여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하은을 세미가 찾아간다. 그런데 하은을 대하는 세미의 태도는 다소 묘하다. 세미는 하은의 다이어리를 몰래 읽는가 하면 하은과 대화할 때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만지작거린다. 하은에게 바로 퇴원해서 내일 수학여행을 같이 가자고 조르는 세미의 모습은 마치 연인에게 조르는 모습 같다. 여고생 간의 동성애 코드가 암시된다. <너와 나>는 성 소수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플롯이 전개될수록 영화가 다루는 특수성이 성 소수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세미와 하은이 사는 지역인 경기도 안산, 내일 예정된 제주도 수학여행, 태풍 너구리로 인해 실종자 수색 작업이 지연되고 있다는 라디오 뉴스, 추모 공원. 세월호 참사가 영화의 모티브라는 것이 암시된다. 비록 영화 내에서 세월호 참사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거나 언급되지는 않지만, 위와 같은 암시를 통해 <너와 나>는 성 소수자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 소수자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을 소수자라고 통칭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인구 통계학적인 의미에서의 소수자가 아니라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었다는 문화 사회학적인 의미에서의 소수자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이 소수자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그동안 이들이 사회로부터 받아 온 상처를 고려하면 소수자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특수성이라는 성질을 여타의 사회 구성원보다 뚜렷하게 띤다는 점이다. 성 소수자는 대중에게는 낯설게 받아들여지는 성 정체성 혹은 성 지향성을 띠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은 다른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었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러한 소수자의 특수성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싶은 걸까?

하은의 손을 다정하게 만지작거리는 세미와 위태롭게 놓여 있는 물컵

하지만 <너와 나>는 보편성의 코드와 특수성의 코드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고 소리치는 식으로 죽음 앞의 평등을 무분별하게 논하지도 않고, “우리가 여기 있다!”라고 울부짖는 식으로 소수자의 존재를 격렬하게 역설하지도 않는다. 그저 두 코드 모두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관객으로 하여금 양자 사이의 연결점을 직관하게 할 뿐이다. 세미와 하은이 병원 휴게실에 들어가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테이블 가장자리에 밑면의 절반만 걸친 채 놓여 있는 물컵이 나온다. 물컵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을 준다. 이 오브제는 영화 내적인 관점에서 보면 친구와 연인 사이에 위치한 세미와 하은 간의 아슬아슬한 관계 혹은 삶과 죽음 사이에 위치한 아슬아슬한 실존적 경계를 표현하지만, 메타적인 관점에서 보면 보편성의 코드와 특수성의 코드 사이에서 양쪽에 조심스러운 손길을 내미는 영화의 위상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2. ‘가 와 중첩될 때

<너와 나>가 이렇듯 조심스러운 줄타기를 하는 의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미가 담고 있는 복잡한 캐릭터성을 살필 필요가 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세미는 성 소수자이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임이 암시된다. 즉 세미는 소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분명 성 소수자를 비롯해 여러 유형의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여타의 영화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정론으로 여겨진 “극의 주인공은 고귀한 신분을 지닌 혹은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라는 클리셰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너와 나>의 세미가 특수성의 시선만을 취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여타의 영화와 차별되는 지점이 여기에서 발견된다.

오히려 세미에게서는 특수성의 시선보다 평범성의 시선이 부각된다. 특수성에 반하는 의미에서의 평범성이 아니라, 소수자이든 다수자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평범성을 말하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분석하면 세미에게서 성 소수자로서의 시선이나 세월호 참사 희생자로서의 시선은 은근히 표현되거나 아예 표현되지 않는다. 이때 세미가 주로 드러내는 평범성은 욕망의 평범성이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세미의 주된 모습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떼를 쓰거나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이다. 위에서 지적한 하은에게 수학여행을 같이 가자고 조르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하은이 십 년 넘게 키우다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낸 강아지인 제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세미는 자기 자신이 느끼는 슬픔에 급급해 눈물을 흘린다. 슬픔이 자기 보존의 욕망에 의해 방어 기제로 기능하는 감정이라는 심리학적 사실을 고려하면 이 또한 욕망에 충실한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욕망의 발로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다. 세미는 하은의 다리 상태나 강아지를 떠나보낸 심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스럽게 세미를 달래고 위로하는 이는 하은이다. 이토록 유아적인 모습으로 역설적인 상황을 야기하는 세미를 “욕망의 ‘나(와 너)’”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중요한 존재자는 오직 ‘나’이다. 하은은 기껏해야 생략해도 되는 괄호 속의 존재자인 ‘너’일 뿐이다. 결국 하은이 수학여행을 못 가겠다고 말하면서 둘은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때 하은이 세미에게 쏘아붙인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애 같다.”

하은은 자신의 아픔을 알아 주지 않는 세미에게 실망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세미의 모습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부모에게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는 우리의 모습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미가 지닌 욕망의 평범성은 관객이 세미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도록 만드는 매개적 속성이다. 플롯이 전개되면서 종종 등장하는 오브제인 거울은 이와 같은 투영을 방증한다. 영화에서 거울은 매번 정면을 향하며 거울에 비치는 인물은 오직 세미뿐이다. 관객은 자신을 향한 거울을 보며 자신과 닮은 거울 속 세미의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다. 세미와 관객의 동치 관계는 점차 공고해진다. 결국 영화는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특수성의 시선에 매몰되지 않고 평범성의 시선을 유지한다.

특수성의 은밀한 시선과 평범성의 노골적인 시선을 동시에 취하는 세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플롯은 계속 전개된다. 이때 변화를 유발하는 중요한 기제는 중첩이다. 중첩의 주체는 ‘나’이며 중첩의 대상은 ‘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중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나’ 앞에 붙은 수식을 벗어던지는 과정과 ‘너’를 둘러싼 괄호를 벗겨 내는 과정이 필요조건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하은과 싸운 후 날카롭게만 행동하는 세미에게 하은의 또 다른 친구인 다애가 퍼붓는 말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다애는 제리를 떠나보낸 하은이 매일 힘들어하며 울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동안 자신에게는 하은이 밝은 모습만 보여 주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미는 충격을 받는다. 이런 세미에게 다애가 던지는 말은 가슴을 찌른다. “너 아픈 거만 아픈 거고 너 힘든 거만 힘든 거야?” “너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만큼 하은이도 사랑받고 싶어 해!” 이를 세미의 입장에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 아픈 거만 아픈 거고 나 힘든 거만 힘든 건가?” “내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만큼 하은이도 사랑받고 싶어 하는구나.” 세미는 첫 번째 문장에서 ‘나’를 수식하는 욕망을 벗어던지고, 두 번째 문장에서 ‘너’를 포위하는 괄호를 벗겨 낸다. “욕망의 ‘나(와 너)’”가 ‘나와 너’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세미의 입장에서 잠재된 상태로 머물던 하은의 존재가 세미 앞에 명료한 상태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곧바로 중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나’의 수식을 벗어던지는 과정과 ‘너’의 괄호를 벗겨 내는 과정은 중첩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세미와 하은의 중첩은 세미가 다른 중첩을 목격한 이후에야 이루어진다. 다애에게서 충격적인 전말을 알게 된 후 세미는 하은과 재회하지만, 만나자마자 극적이고 감격스러운 화해를 하지는 않는다. 다소 엉뚱하게도, 둘은 똘똘이라는 강아지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주인을 만나 그녀의 사연을 듣는다. 이 지점에서 강아지 주인이 하는 말은 영화를 통틀어 중요한 말이므로 그대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 “거짓말 같이 사라져 있었어요. 원래 없었던 것처럼.” “남들은 개 하나 사라진 게 뭐가 대수냐고 그러는데, 키워 보면 그게 아니거든요.” “아프진 않을까. 죽었다면 차라리 고통스럽게 죽지만 않았으면 좋을텐데.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매일 자책하고 정말 죽고 싶었어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강아지 주인의 사연을 들은 하은은 처음으로 세미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인다. 제리를 떠나보낸 하은이 상실감과 슬픔을 겪은 강아지 주인과 중첩되는 장면이다. 중첩의 촉매제는 공통적 경험이다. 잠시뿐이지만 똘똘이를 잃어 상실감과 슬픔을 겪은 강아지 주인과, 제리를 잃어 같은 감정을 겪은 하은의 공통적 경험. 하은은 이를 발견함으로써 강아지 주인과 자신을 중첩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세미는 그런 하은을 복잡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출(?)한 강아지 똘똘이를 돌보고 있는 세미와 하은

하은과 강아지 주인의 중첩을 목격한 세미는 드디어 하은과의 중첩을 이루기 시작한다. 중첩의 촉매제는 역시 공통적 경험이다. 세미의 경험은 강아지 주인이 자신의 사연을 말하는 시점부터 스크린에 펼쳐지는 세미의 불길한 꿈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는 영화 초반부에 세미가 꾸었던 꿈의 내용이기도 하다. 꿈에서 세미는 자신이 키우는 앵무새인 조이를 잃어버린다. 땅에 떨어진 조이의 깃털을 하나씩 주우며 동네를 거닐던 세미가 도착한 곳은 풀밭이다. 풀밭에는 하은이 죽은 채로 누워 있다. 제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잃은 하은의 경험. 그리고 꿈속에서 조이라는 소중한 존재, 나아가 하은이라는 소중한 존재를 잃은 세미의 경험. 세미는 자신과 하은의 공통적 경험을 발견함으로써 하은과 자신을 중첩시키게 된다. 세미와 하은의 중첩은 이후 하은에게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는 세미의 말을 통해 극대화된다.

“(꿈속에서) 내가 너가 돼서 깨어났어.” 세미의 말과 함께 교실에서 깨어난 하은의 모습이 묘사된다. 공교롭게도 꿈속의 하은이 앉아 있는 자리는 세미의 자리이다. 이어서 세미는 하은이 풀밭에 죽은 채로 누워 있는 장면을 이야기한다. “너가 죽어 있었어. 죽어 있는 얼굴이 울 엄마 아빠 같기도 했고, 담임 쌤 같기도 했고, 우리 반 친구들 같기도 했어. 우리가 다 죽어서 거기 누워 있었다는 게 지금도 너무 무섭고 이상해. 근데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렇게 욕망의 ‘나’에서 ‘나와 너’로 나아간 세미는 하은과의 중첩을 경험한다.



3. 공감의 너와 나로 변화하기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미가 경험하는 하은과의 중첩은 세미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그러나 이를 욕망의 ‘나’에서 ‘나와 너’로 나아가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욕망의 ‘나’에서 ‘나와 너’로 나아가는 것은 중첩의 필요조건이지 중첩의 결과인 변화가 아니다. 중첩의 결과 일어나는 세미의 변화는 바로 공감이라는 감정적 반응의 수행이다. 직전에 인용한 세미의 말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미의 마지막 말이다. “근데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미의 이 말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함축한 말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직후에 세미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하은아 진짜 미안해. 너가 얼마나 쓸쓸하고 힘들었는지 몰라줘서 미안해.” 만약 풀밭에 죽은 채로 누워 있는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세미의 말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함축하고 있었다면 세미는 직후에 ‘너’가 아니라 ‘나’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하지만 세미는 하은의 상실감과 슬픔에 초점을 맞추며 하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다. 즉 ‘너’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근데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라는 세미의 말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또다시 상실감과 슬픔을 겪을 하은의 고통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으리라. 이는 분명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아닌 타인-지향적인 태도를 가리키며,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의미한다. 꿈속에서 하은이 되어 깨어났다는 세미의 말은 이러한 해석에 설득력을 더한다. 결과적으로, 소중한 존재를 잃은 공통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중첩은 하은을 괴롭힌 상실의 고통에 대한 세미의 공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침내 아픔에 공감해 주는 세미의 모습에 하은은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는 세미 앞에서 하은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하은을 안아 주는 세미의 표정은 왠지 낯설다. 플롯이 전개되는 내내 드러냈던 표정과 다르게, 하은을 안고 있는 세미의 표정은 자못 어른스럽다. 세미와 하은의 관계에 일종의 전도가 일어난다. 이전에 세미는 떼를 쓰고 감정을 마구 표출한 반면 하은은 그런 세미를 달래고 위로하는 동시에 자신의 슬픔을 숨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은이 목 놓아 울고 세미는 성숙한 표정으로 하은을 위로한다. 욕망에만 휘둘리던 세미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완벽히 변화한다.

나아가 공감의 대상이 되는 하은의 고통은 단지 제리를 잃은 고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세미가 하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는 시점에 스크린에는 학교에 홀로 남은 하은의 모습이 그려진다. 추정컨대 다른 학생들은 수학여행의 목적지인 제주도로 향하던 중 참사를 당한 것 같다. 하은은 다리가 다 낫지 않아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바람에 참사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친구들의 부재로 인한 공허뿐이다. 홀로 남은 하은은 학교를 빠져나와 세미와 함께 거닐던 공원을 혼자 거닐기도 하고,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다른 공원을 둘러보기도 하고, 세미와 같이 탔던 버스를 혼자 타기도 한다. 버스 안에서 태풍 너구리로 인해 실종자 수색 작업이 지연되고 있다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온다. 겨우 덤덤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내던 하은은 결국 소리 없이 눈물을 펑펑 흘린다. 이제 공감의 대상이 되는 하은의 고통은 제리를 잃은 고통을 넘어, 세미를 비롯한 친구들을 잃은 고통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관객은 세미가 취한 평범성의 시선을 빌려 하은의 고통에 공감하게 된다. 세미에게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평범성의 시선을 가지게 된 관객이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 특히 유가족들이 느끼는 고통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위에서 인용했던 강아지 주인의 말을 되새겨 보면 그 말은 유가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관객은 그러한 절절한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욕망만을 중시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모습에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으로 변화한 세미와 같아진다.

이쯤에서 죽음이라는 보편성의 코드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이라는 특수성의 코드 간의 관계가 명확해진다. 보통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의 고통은 대중에게 특수성의 범주에 속한 고통으로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미디어의 몇몇 메시지들도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고통을 특수성의 범주에만 속한 것으로 여겨 왔다. 하지만 영화는 특수성을 띤 세미의 시선을 평범성에 포섭시키는 것처럼,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의 고통을 보편성의 범주로 포섭시킨다. 그들의 겪은 아픔, 상실감, 슬픔, 고통은 우리가 평소에 겪는 아픔, 상실감, 슬픔, 고통과 동일한 유형의 감정이다. 비록 그들의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아득하다는 점에서 특수성의 범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지만, 소중한 존재를 잃은 경험으로 인해 발생한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우리의 감정과 다르지 않으므로 보편성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 것이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 이렇게 죽음이라는 보편성을 공유하는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느끼는 고통에 막연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하은의 집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주인공

이처럼 <너와 나>는 보편성의 코드와 특수성의 코드 간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한다. 양자는 상호 연관의 관계를 형성한다. 보편성의 코드나 특수성의 코드만을 강조하지 않고 양쪽을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은 관객의 공감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는 효과를 낳는다. 소수자의 특수성을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전략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이는 특수성과의 접점이 없는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효과적인 전략이 아니다. 심지어 지나치게 특수성을 강조하면 오히려 대중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위험도 있다. 하지만 소수자와 대중 사이에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성이라는 다리를 놓는 전략은 대중으로 하여금 소수자의 특수성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이 <너와 나>의 관객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의 고통에 별다른 내적 저항 없이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 소수자의 특수성을 바라보는 관객의 관점도 자연스럽게 공감의 관점으로 변화한다. 하은에게 사과를 하면서 세미는 마침내 자신이 품고 있던 사랑의 감정을 고백한다. 그리고 하은도 세미에게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둘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동성애라는 특수성에만 귀속되는 사랑이 아니다. 세미와 하은의 동성애 또한 사랑이라는 보편성의 범주에 포섭되는 감정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연인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여느 이성애자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또한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남학생과 여학생의 이성애에 비해, 세미와 하은의 동성애는 다른 관계에서의 사랑과 공유하는 지점이 더욱 많을 수도 있다. 사회적인 분위기상 세미와 하은은 서로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부모에게 혹은 자식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건네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각주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를 좀 더 덧붙이자면, 이러한 공통점을 근거로 세미와 하은의 관계를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한 마디로 영화는 세미와 관객이 욕망의 주체에서 공감의 주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로써 ‘나’는 ‘나와 너’를 거쳐 최종적으로 ‘너와 나’로 변화한다. ‘나와 너’의 단계에서 여전히 우선시되는 것은 ‘나’라는 주체이다. ‘너’는 주체에게 실존적 문제의 대상으로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중첩을 통한 공감이 이루어진 후 ‘너와 나’에서 ‘너’는 ‘나’에 앞서는 배려의 대상, 즉 ‘나’보다 우선시되는 대상으로 존립하게 된다. 욕망의 ‘나’에서 공감의 ‘너와 나’로의 변화. 영화의 제목을 고려할 때 <너와 나>가 지향하는 종착점은 바로 공감의 ‘너와 나’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너와 나.’ 일상에서도 많이 쓰일 정도로 친숙하고 단순한 이 명사구는 공감에 대한 영화의 근본적인 태도를 시사한다. ‘너와 나’라는 표현은 공감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주체와 타자의 구별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표명한다. 영화가 바라는 공감은 의지의 동일성이라는 미명 아래 주체와 타자를 완전히 일치시켜 구별 불가능성을 띠게 만드는 쇼펜하우어식 공감도 아니고, 주체와 타자를 ‘우리’라는 통일된 집단으로 환원시켜 연대의 구호를 외치게 만드는 정치적 공감도 아니다. 하은의 고통에 대한 세미의 공감, 그리고 소수자의 고통에 대한 다수자의 공감. 영화가 지향하는 이러한 공감에는 그 어떤 윤리적 당위 혹은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용하지 않는다. 단지 공감을 받는 대상과 공감을 하는 주체가 ‘너와 나’로서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온전히 공감을 주고받는 주체와 타자로 남을 때, 우리는 아도르노가 지적한 동일성의 폭력에 젖지 않으면서 순수한 공감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공감은 공감 그 자체로 남을 때 비로소 공감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너와 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생들의 일상을 그려 낸다.

4.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위로

<너와 나>에는 세미와 하은 말고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생들이 등장한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평범한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모습, 복도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 하교하는 모습, 쇼핑하는 모습,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등 일상적인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성 소수자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유가족들이 모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들이 겪은 비극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 왔던 비극이며 따라서 앞으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고통을 우리가 이질적인 것으로 대하고 심지어 혐오스러운 것으로 대하는 태도가 과연 정당한 태도인가. 우리는 고통을 겪는 그들이 사회에서 2차 가해에 의해 피해를 입는 현실을 심심찮게 목도한다. 영화는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지양하고 그들에게 그저 순수하게 공감할 것을 희망한다. 영화에서 공원에 앉아 있는 세미는 땅에 떨어져 더러워진 공룡 장난감을 아이가 줍는 모습을 바라본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할머니는 “지지야.”라고 말하며 아이를 말리지만, 아이는 천진난만하게도 자신이 공룡 장난감을 구해 줬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소수자의 고통에 “지지야.”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공룡 장난감을 구해 주는 아이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위로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저 고통을 겪었던 그리고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공감하는 것이 위로이다. 똘똘이를 되찾은 주인에게 하은이 울면서 건네는 한 마디에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위로가 응축되어 있다.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너와 나>는 우리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우리는 강아지 주인에게 하은이 건넨 말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소수자에게 건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방-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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