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지현 Nov 06. 2023

아빠가 물려준 자산

기억력이 안 좋다. 일상적인 건망증이 아니다. 소중한 사람과 보낸 시간조차 오래 지나면 잊어버리는 기억력을 가졌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종종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걸 보면, 타고난 것 같다. 자연스레 사라지고 마는 짧은 기억력에 속상할 때도 있었다.     


짧은 기억력은 아빠를 닮았다. 아빠는 나보다 더 기억력이 안 좋은데, 최근의 일 외엔 대부분 잊어버리신다. 어릴 적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진 이후로 기억력이 안 좋아지셨다고 하시는데, 내 생각엔 유전적인 것 같다. 나까지 이렇게 안 좋은 걸 보면.     


부실한 기억력으로 살다 보니, 당황스러운 순간들을 많이 만난다. 학교 준비물 까먹고 간다거나, 버스에 우산을 놓고 내리는 일은 다반사. 길에서 만난 친구 이름을 기억 못해 부르기를 주저하거나, 동창들과 옛날 얘기할 때면 홀로 공감하지 못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억력이 아주 좋은 친구들이 꼭 한 명씩은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기억할 수 있게 도와준 건 그 친구들 덕분이었다.     


기록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빠를 닮은 점이다. 우리 집 저녁 풍경은 두 사람은 TV를 보고 있고, 두 사람은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TV를 보는 사람은 엄마와 동생, 끼적이는 사람은 아빠와 나였다.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서, 아빠는 업무일지를, 딸은 다이어리를 끼적이는 밤.      


책상에서 다이어리를 적던 십 대는 자라서 장 볼 목록, 아이 유치원 준비물, 주차 위치를 메모하는 삼십 대가 되었다. 이 정도는 살기 위해 하는 기록. 주 단위로 해야 할 일 목록을 적는 것도 필수다. 그리고 글감을 위해 주요한 에피소드는 꼭 기록해두곤 한다. 아이들이 했던 예쁜 말이나, 오늘 있었던 감동받았던 일, 사람, 상황은 짧게라도 꼭 메모해둔다.     


아빠의 기록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최근에서였다. 짧은 기억력에 불편을 못 느꼈던 난, 아빠의 기억력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기록을 열심히 하시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내 기억력이 얼마나 글 쓰는 데 장애가 되는지 처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난생처음 한 달짜리 기억력을 가진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의문. 아빠는 어떻게 살아온 걸까? 이런 기억력으로.    

 

아빠는 기록과 관련해서는 장비를 아끼지 않으신다. 노트북, 패드, 휴대폰 녹음, 프랭클린 플래너, 몰스킨, 스프링 노트, 필름 카메라 등 장르도 다양하게 갖춘 아빠의 기록들. 덕분에 아빠는 꼼꼼하고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하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인연을 맺은 거래처들이 이를 증명한다. 시도 때도 없이 삼각대를 설치하고 식구들의 모습을 촬영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까. 잠옷 바람으로 사진에 찍힌 가족들은 볼멘소리를 늘어놓기만 했다.      


어느 날 아빠의 필름 카메라 속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반가운 모습들이었다. 사진 속엔 엄마가, 동생이, 내가 있었다. 살과 살을 맞대고 부비 대는 말랑한 우리가 있었다. 생활 냄새 가득한 사진들엔 가족들의 작은 소란이나 에피소드가 모두 담겨 있었다. 우리의 뒤에는 늘 아빠의 시선이 있었다.


유은이가 태어나고부터는 유은이의 성장 과정을 카메라로 담아주고 계신다. 가끔 아빠의 카메라를 들여다본다. 내가 모르는 딸아이의 얼굴을 볼 때면, 할아버지의 눈 속에 담겨있었을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 짓게 된다.     


아빠와 난 좋지 않은 기억력을 갖고 태어나서, 일상을 더욱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기록해놓지 않으면, 곧 기억 저편으로 잊어버린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기억력의 한계가 알게 해준 선물이랄까. 한때는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아빠로부터 받은 자산. 한계가 있기에 더욱 그 가치를 소중히 대해야 함을 알게 해준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보다 과거를 잘 잊어버리는 우리는 때로는 매정하고 무심해 보일 거다. 소중한 추억을 간직해주질 않으니, 주변으로부터 핀잔도 많이 듣곤 한다. 

사실은 남들만큼 기억하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아 속상하고 불편한 우리의 고충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목요일을 기다리는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