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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Nov 08. 2023

경단녀의 희망

“엄마, 부모님 직업 물어봤는데, 책 파는 사람이라고 했어.”


저녁을 먹던 중에 유은이가 문득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 물어봤어?”

“아니, 영어학원에서. 그런데 내가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몰라서, 책 쓰고 파는 사람 흉내 냈지. 흐흐.”

“책 파는 사람은 아니지, 엄마는. 엄마는 책 쓰는 사람이야.”

“그럼, 영어로 뭐라고 해야 해?”


저녁 식사 자리는 갑자기 영어 공부방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가족들 모두 영어 단어 찾기에 골몰했다. 

“음... author아닌가?” “아니야, writer 아니야?”

author든 writer든, 무엇이 중요하리.     

“유은아, 아빠 직업은 뭐라고 했어?”

“엄마 것만 얘기했는데? 한 명만 얘기하면 돼서. 아빠 직업은 뭔지 너무 복잡해서 이름도 잘 모르고 해서.”


실망하는 얼굴로 유은이의 앞에 앉아, 열심히 아빠의 직업을 영어로 설명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 됐어.     


경단녀. 경력이 단절된 여자를 줄여 말한다. 뭔가 절단난 것 같고 위태위태한 느낌인데, 마치 떡 이름처럼 한없이 가볍게 여겨버리는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줄여 말하기를 좋아하는 시대, 어떤 특성을 가진 여성 그룹에 OO녀란 이름을 붙여 묶어버리기를 좋아하는 시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고, 와중에 경단녀로 사는 중이다.     


경단녀로 살고 있어서, 주변에 경단녀만 모여드는 건지, 아무튼 내 주위에는 경단녀들 투성이다. 유은이와 함께 영어학원을 다니는 친구 A의 엄마도 경단녀, 같은 아파트 8층에 살고 있는 친구 D의 엄마도 경단녀, 유치원 단짝 친구 S의 엄마도 경단녀, 어린이집 남자친구 W의 엄마도 경단녀, 문화센터 시절 친구 J의 엄마도 경단녀다. 시절별로 골고루 사귄 경단녀 친구들.     


뭔가 일을 하고 싶지만 못하고 있는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경단녀로 살지만, 사실은 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우선 두 아이를 키운다. 이것만으로도 일상이 정신없고 허리가 휘청일 지경이다. 체력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32평 아파트의 청소와 4인 가정의 빨래와 식사, 설거지를 책임진다. 아이 키우느라 남는 체력이 없어, 겨우겨우 해내는 수준으로.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복귀할 것을 대비해 틈틈이 나만의 일을 한다. 나만의 일은 경단녀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내 경우 글을 쓴다. 이것이 아무도 관심 없지만, 하나로 묶어 평가해 버리곤 하는 오색빛깔 서로 다른 경단녀의 일이다.     


성공과 효율에만 눈길을 주기도 바쁜데, 빠른 속도로 영상과 이미지 정보들을 처리하기도 바쁜데, 아직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둘 여유까지 있을 리가 없다. 이들이 가진 저마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은 더더욱. 경단녀는 그저 능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엄마 사원은 회사에 도움 안 되니 그만두는 게 낫다거나, 애 볼 사람 없으니, 집에서 애나 보라거나 하는 식으로 처리된다. 이후 경단녀란 단어를 붙이면 끝.     


경단녀란 단어를 만든 사람을 찾아가 원망을 늘어놓을 수도 없고, 인터넷에 쉽게 댓글을 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부연 설명과 함께 주장을 내세우지도 못한다. 복수의 불꽃은 마음속으로만 피우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지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식탁에서 생긴 작은 균열은 경단녀에게 복수의 불꽃이 희망의 불꽃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부모의 직업 질문에 아빠의 직업 대신, 엄마의 직업을 답한 아이.

등하교를 돕고, 집에서 일을 하는 엄마의 직업을 주부가 아닌, 작가라고 생각한 아이.

아이의 생각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매우 희망적인 미래를 향해 당당히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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