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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로 Jan 15. 2021

나는 바닷새가 되기도, 카이사르가 되기도 싫다

여유, 사랑, 행복을 위하여

- 마음과 몸이 동시에 바쁠 때는 누군가에게 여유를 줄 수 없음이 독이 되었는데, 막상 여유가 생기니 이 또한 다른 차원의 독이 되더라. 구체적으로는 치사를 경험하는 주체만 달라졌을 뿐이랄까. 단,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치사 수준이 아닌 수준의 독은,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이다. 적정 수준의 고통은 그에 뒤따르는 행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필요한 건 어떤 쪽이든 견디내는 내성일것이다.


- 우리의 뇌에서 신체적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 부위는 사실상 같다는 연구결과를 보았다.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실례들을 마술사가 입에서 카드를 뿜어내듯이 다발로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마음이 안 좋았을 때 신체를 올바르게 가누지 못했던 까닭이 이 때문이었구나 감탄하며 동시에 울적해했다. 어제까지 인바디 점수 90점을 받던 몸뚱이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 덕분에 형태만 간신히 존재하는 눈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1년 중 눈사람이 본 형태로 견딜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드물다.


- 때로는, 정신적 가해보다 차라리 신체적 가해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제발 정신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반반씩만 나눠서 주었으면 한다. 아, 이건 다른 쪽으로 위험한 생각인가. 사족을 덧대자면 마조히즘은 필자의 취향이 결코 아니다.(*TMI : 그레이의 50가지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냥 후자 쪽이 견디기 더 쉽다 생각했을 뿐이다.


- 덧붙여, 단순히 몸이 좋아서 건강해 보이는 사람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더욱 희귀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둘 다 건강한 사람은 건물주를 찾는 수준으로 어렵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고 말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우리 중 대부분은 두 가지 항목 다 온전하지 않다. 너무나 슬프다. 한 방향의 건강 정도는 확실하게 해 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난 지난히도 슬퍼왔었고 때로는 눈물을 줄줄 흘려왔었다. 그래서 작년은 한쪽 눈의 눈물만이라도 닦으려 애써왔다.


- 그래,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 헬스장을 참 열심히 다녔다. 하루에 2~3시간 + 주에 5-6회를 다녔으니 말이다. 근데 식단관리를 대충 하니까 몸은 참 안 늘더라, PT를 받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 분야에 쏟을 여유돈은 없었다. 어쨌든 운동량 자체가 많으니 몸은 확실히 좋아졌고, 현재도 내 생애 가장 좋은 몸상태인 건 맞다. 근데, 여전히 좋아하는 음식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마치 특정 음식에 대한 식욕은 구멍 뚫린 항아리 같아서 한번 가득 채워놓는다 해도 어느새 다시 비어 가는 것 같다. 근데, 더 큰 문제는 난 그런 항아리가 '너무' 많다.


- 난 누구나 좋아할 만한 한식, 중식, 일식, 치킨, 족발 및 보쌈은 당연히 좋아하고, 여성분들이 많이 좋아하는 떡볶이, 닭발, 디저트 류도 좋아하며, 주로 남성들의 소울푸드인 국밥, 돈까스, 제육 등의 음식도 좋아한다. 과자도 좋아하고 초콜릿도 좋아하고 달고 느낀 한 거 다 잘 먹는다. 젠장 도대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 아, 두부를 싫어한다. 근데 꾸준히 싫어한다고 말하며 살아오다 보니 내가 정말 싫어하는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들러 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음식을 싫어한다'라는 항목을 채우고 과시하기 위해서 '두부'를 억지로 끌어들인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는 프로이트식으로 '초등학교 2학년 남원 여행 당시 두부 음식을 억지로 먹다가 토했던 기억이 있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말했었는데, 올해부터는 아들러 식이 추가되었다. 조금 더 건강한 느낌이다. 그래서, 올해는 두부를 다시 먹어보고자 한다. 내가 자아낸 두려움에 끊임없이 조종당하는 느낌이 싫다. 일단 두부김치나 순두부찌개부터 시작해봐야지. 욱.




- 자 다시 돌아와서, 적정 수준의 마음과 몸의 여유 그리고 이를 능동적으로 조절해나갈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 몸의 여유는 생각보다 조절이 쉽다. 그냥 본인의 현재 상태와 스케줄을 정리하고 있고, 서로가 이를 '알려고 한다'면 어렵지 않게 맞혀갈 수 있다. 여기까지는 기계적인 영역이다. 2x2 루빅스 큐브를 맞히는 정도 수준이라고나 할까. '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해서 19금이 아니고, '9금' 정도의 영역이다.


- 마음의 여유가 문제다. 혼자 있을 때의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도 어려운데, 특정 상대방이 개입한다면 더욱더 혼란스러운 상황이 왕왕 발생하곤 한다. 이를 조율해나갈 만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 첫 번째 문제요, 그 상대방이 그 조율의 번거로움을 받아줄 만한 사람인지가 두 번째 문제, 끝없이 검증이 필요하며 이 검증을 서로 자연스럽고 즐겁게 느껴야 한다는 게 세 번째 문제이다. 말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보통 적정 수준에서 타협을 보곤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적정'을 얼마만큼으로 하느냐를 큰 고민 없이 진행함에 따라 많은 알력이 생기곤 한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필요한 영역인데, 자주 감성만을 내세우곤 한다. 달달한 커피를 타야 하는 상황에 커피는 안 넣고 물에다 시럽만 잔뜩 넣고 마시는 꼴이다.


- 아, 추가적으로 이 두 가지와 더불어서 본인의 외적 및 내적 취향(잘생겼거나 예쁘거나 착하거나 도도하거나 등) 또한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 보면 사람 만나는 일이 쉽지가 않다는 게 실감이 난다. 심지어 이렇게 까지 애를 써야 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 근데, 애를 쓰자는 게 아니다. 그냥 괜찮아 보이는 팁을 공유할 뿐이다.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고 싶으면 냉장고에 넣어서 먹으면 된다 따위의 팁은 아니며, 딸꾹질이 나올 때는 혀를 잡아당기면 된다 정도의 팁은 될 것이다. 아, 비행기 이륙 시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이어폰을 끼면 귀가 먹먹한 증상을 막을 수 있다 정도의 팁도 될 것이다. (*진짜 되더라) 필요 없어 보이면 그냥 넘기면 그만이다. 나는 모든 방식의 강요를 선호하지 않는다.


- 사람을 만나갈수록 세밀해지는 취향(외적 취향을 포함)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회사에서 정기감사를 진행하듯이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 이와 동시에 이 '세밀함'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차라리, '난 예쁜 사람(잘생긴 사람)이 좋아'라고 말하는 이가 얼마나 순수하고 편견 없는 사람인지를 수 차례 깨닫는다. 외모의 잘남에도 수 가지 기준이 존재할 것이며, 객관적인 불만족도 결코 주관적인 만족을 이겨내진 못할 것이다. 다만, 어떤 세밀한 이가 그 기준 중 일부가 충족이 안된다 하여 관계의 시작을 망설이는 경우가 문제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 그래서 적정 수준의 세밀함만을 가지려 의식한다. 과의식과 자만이 가장 위험하게 작용하는 분야가 이 쪽이 아닐까 싶다. 본인을 찔렀을 때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그 가상의 물체를 벼리려 한다.




-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린 늘 누군가를 만나왔고, 만나고 있고, 반드시 또 만나게 될 것이다.


- 연애를 끽해야 한 두 번 경험해봤을 무렵에는, 다양한 이유로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열렬한 마음의 쏟음에 이어지는 이별에서 얻을 수 있는 아픔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고통들을 굳이 물성화시켜본다면 아마 온 세상의 기괴한 형상들을 다 모아놓은 징글징글한 형태가 될 것이다. 만화가 이토 준지도 두 손 들고 물러날 수준이 분명할 것이다.


- 이러한 아픔에는 헤어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만, 일단 몇 가지로 추려보고자 한다. 첫 번째, 한 사람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공허함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음이 무서움. 두 번째, 난 이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실상은 그냥 잘나 '보이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세 번째, 연애 자체를 다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그 지루한 모든 과정을 다시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마지막이다.


- 자 다행히도, 세 번째는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며 연애를 지속하면 어렵지 않게 사라진다. 그리고 두 번째 또한 비슷한 시기에 흐릿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처럼 본인의 성장에 따라 이별의 무서움 중 대부분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 그런데, 첫 번째 무서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색은 대부분 검은색을 띠고 있지만 그 채도와 구체적인 색상은 상대에 따라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한 관계가 끝나는 순간 그 가상의 막은 나를 뒤덮는다. 그 순간만큼은 유출된 기름에 힘겨워하는 한 마리의 바닷새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당시 현장 봉사활동을 가기까지 했으니 이런 과감한 비유는 좋게 좋게 봐주시라)


- 그리고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그 바닷새가 되었었다. 갖지 못한 날개 속으로 어두움이 치밀어오는 것을 느꼈으나, 이내 그 침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견뎌왔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다가오는 것 같았던 도움의 손길은 나의 날개를 반대로 뒤집을 뿐이었고, 단지 그쪽에도 빠짐없이 검정을 칠하기 위했을 뿐이었다. 아, 끊임없이 처참했다. 빛났던 나의 자존심이 새의 날개처럼 꺾여갔다.


- 때로는 근거리에 있는 사람이 더욱 무섭다. 우리나라는 총기 허용 국가가 아니기에 칼로 비유를 하자면, 멀리 있는 사람이 나를 칼로 찌르려 할 때는 최소한 '아, 나를 찌르려 다가오는구나 젠장 어쩌지?'라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와 바로 5m 이내(친밀하니까)의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주머니에서 핸드폰 꺼내듯이 꺼낸 칼에 질리는 경우에는 어떨까? '아, 나ㄹ'까지 정도만 발음을 해내고 상대를 동그랗게 쳐다볼 수 있을 뿐일 것이다. 카이사르의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언이 아직까지 회자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바닷새가 되기도 싫고, 카이사르가 되기도 싫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되지 않는 방법도 분명히 알고 있다. 예전에 되어 봤을 때부터 안 되는 방법을 쭉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근데, 공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엔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나는 2010학년도 수능을 망쳤기 때문에 그때 기준으로 계속 공부해왔으나, 작년은 2021 수능이 치러진 해였다. 이론뿐만 아니라 실전 상황에 따른 활용의 다채로움 필요하다. 아, 너무 어렵다. 4점짜리 문제인가 보다.


- 그러나, 학습과 경험 그리고 반성이 뒷받침된다면 우린 결국 또 해낼 것이다. 태연하게 견뎌내고 지내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의 내 문제는 반성이 흐릿했었던 것이었다. 물론 반성이 필요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잘못이 없다. 상대를 보는 눈이 부족한 본인을 위한 반성이라고 생각하자. 어쩌다 보니 글이 서간문과 반성문의 중간 형태로 흐르는 것 같다.


- 많은 이들이 여유를 찾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 구체적으로는 내 주변 사람 그리고 이 글을 진심으로 읽어 준 사람만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난 이기적인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내 사람들만을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이 마음을 먹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오히려 행복의 총량은 증가할 것이다. 애매하게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기보단 너! 너! 너! 가 행복하길 바란다 라고 말하는 게 더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암튼 행복은 그렇고, 다들 올 한 해 아프지 마시라. 이 정도는 기원해드릴 수 있다. 그럼.


*Ariana grande - honeymoon avenue를 끊임없이 들으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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