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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르 Jan 08. 2021

커피를 대하는 교양 없는 자세

핸드드립, 콜드 브루로 시작해 네스프레소까지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건 거짓 없는 사실이다.


 다만, 맛의 차이를 아주 잘 느끼는 소위 '맛잘알'이 아니다.


 평소 유난히 많은 취미 덕분에 비교적 넓고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나는 커피라 해봐야 뭐, 품종은 아라비카, 리베리카, 로부스타 그 외 몇 가지가 있고 품종도 품종인데 제배 환경에 따라서도 맛이 유별나게 바뀌기 때문에 상품화된 제품이라고 한다면


 "아, 뭐 나보다 잘난 혀를 가지신 양반들이 만들었는데 그냥 먹자"


 라고 간단한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모험심 가득한 나는 더 뛰어난 맛을 찾는 그런 고상한 취미활동과는 다르게, '로스팅되지 않은 커피는 어떨까?'같은 아주 1차원적인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로스팅은 본디 커피 종자 유출을 막기 위해서 더 이상 씨앗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볶는 것이었다. 그러면 종자 유출과 무관하게 그냥 먹어보는 건 어떨지 궁금하지 않은가? 답은 직접 경험으로 배우자. ㅋㅋ)


 커피의 분류, 쓴/신/단/짠/향/풍미/바디감 이 일곱 가지 중 아직도 향과 풍미의 사전적 정의는 알지만 구분은 되지 않고, 바디감은 종체 추상적이라 이해를 하지 못했기에 참 애매한 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커피 추출법에 따라 내가 이해하는 맛의 선에선 변화를 구분할 수 있었던 탓에 핸드드립, 콜드 브루부터 귀찮을 땐 프렌치 프레스, 드립머신을 사용해 마셨고 에스프레소 머신까지는 너무 큰 욕심이라 생각했기에 눈독만 들이고 있었다. (물론 눈독을 들인 건 슬레이어라고 커피머신계의 슈퍼카쯤 되는 놈이다. 어림도 없지 암.)




 캡슐커피를 몰랐던 건 아니다. 더닝-크루거 효과라는 말을 아는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격언으로


 "빈 깡통이 요란하다."


 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사람 손이 적게 타고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는 믹스커피나 별반 다를 바 없다."


 라는 내 빡대가리의 발상에 캡슐커피를 무시했지만,


 "내가 일류 바리스타 마냥 핸드드립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맛에 미친 듯 민감한 게 아닌데 내가 드립 한 커피보다 맛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이 아주 당연한 생각을 무슨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듯 하게 된 나는 충격에 빠져서 진지하게 캡슐커피의 구입을 고려하게 됐다.


 흠... 캡슐이 700원 내외니까 카페에서 3000원에 사 먹었다 치고 잔당 차액 약 2300원 세이브.


기계 + 캡슐 84개 구입 = 20만

2300 × 84 = 193200


 87잔만 마시면 손익분기!


그 고민은 절대 길지 않았다. 3분?


 어제 도착한 머신을 대충 세팅하고, 추출해 마셔본 후로 맛있어서 불과 8시간 동안 9잔을 마셔버린 대참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쓰읍...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목표액의 10%를 넘겨버렸으니...


 마치 실내를 벗어나야 할 수 있는 흡연을 전자담배로 바꾼 이후 실내에서 가능하게 되니 계속 입에 물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아 참 아이러니 하다.


 본업이 전자회로 설계인만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하루의 2/3 이상 되는 내가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이 커피머신은 앞으로 내 주유기로써 열심히 일해줄 예정이다.




 커피라는 취미를 심신의 안정을 위해 고상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주 1차원적인 마인드로 접근하는 나는 이제 캡슐의 내부를 뜯어보고 가능하다면 홍차잎 따위를 넣어보는 헛짓거리를 하러 갈 것이다.


 커피가 고상한 취미라는 것도 엄청난 선비질에서 출발한 인식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다르긴 할지라도 딱히 내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글은 로스팅 안된 커피를 추출해본다거나 에스프레소 기계에 헛짓거리를 하는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만 흘렸지만,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해 나와 비슷한 길로 끌어들이려는 나의 짓궂은 장난 섞인 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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