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솔직해도 괜찮은 걸까. 아니, 이렇게까지 솔직할 수 있어야 에세이구나. 오늘 다 읽은 에세이집에 대한 감상은 ‘놀라움’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거칠고 투박한 형태로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에 조금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고개가 끄덕여졌다. 온갖 욕심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차라리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말하니 약간 통쾌하기까지 했다. 순수한 꿈을 꾸는 사람도 어딘가는 있겠지. 그래도 대부분은 그 꿈에 ‘세속적’이란 수식어가 붙는 욕심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나만 그래?) 원하는 목표를 이루면서, 기왕이면 경제적 이득도 함께 손에 들어왔음 싶다. 볕 잘 들어오는 베란다가 있는 방 2개짜리 집에서 살고, 자동차도 부릉부릉 몰고, 주머니 사정 걱정 없이 라떼를 매일매일 마시는 그런 여유로운 삶. 얼마나 좋아. 무릎을 탁 치며 생각한다. 작가님, 저도 그래요. 저도 욕심왕이에요. 빙글빙글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아니, 그보단 돌려 말하고 싶지 않단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책이 되어 많은 사람들 손에 들리는 에세이에서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는데, 읽어주는 사람도 없는 글을 쓰는 나는 왜 솔직하기가 어려운 걸까.
솔직하지 않다는 게 거짓을 말한다는 건 아니다.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는 거다. 나 자신에 대한 사실을 오픈된 공간에 적는 게 두려운 것도 일부 있다. 하지만 그뿐 아니라, 감정이나 생각을 적는 것에 있어서도 망설임이 끼어들 때가 자주 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이 생각은 남들한테 말하긴 좀 부끄러운 것 같아.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게 상당량의 '글러먹음'과 아주 약간의 '썩 나쁘진 않음'이라 치면, '글러먹음'은 되도록 적게, '썩 나쁘진 않음'은 확대해서 표현하고 싶은 거다.
내 플레이리스트엔 친한 사람들한테도 말하기 창피한 곡들이 꽤 들어 있다. 나는 정말 좋아하지만, 내가 이 노래를 듣는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면 좋겠다. 혹시라도 내가 지금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지 남들이 물어본다면, 팝이나 인디 음악, 아무튼 좀 있어 보이는 음악을 들을 때면 좋겠다. 남들 눈에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비치길 바란다. 못난 모습 들키고 싶지 않다. 말 못 할 내 음악 취향은 꽁꽁 숨기고, 세련된 음악을 듣는 나로 보이고 싶다는 그런 마음. 글 쓸 때 솔직해지지 못하는 마음은 그 마음과 결을 같이하는 것 같다. 글 속의 내가, 나 자신이 바라는 사람이길, 글을 통해 나를 접하는 사람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인식해주길, 그런 마음.
남이 읽진 않아도 얼마든지 접근 가능한 곳에 글을 올려 솔직해질 수 없는 거라면, 그냥 혼자 일기장에 쓰면 되잖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토록 활짝 열린 공간에 글을 써 남겨두고 싶다. 누군가 우연히라도 읽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써 내려가는 데 조금이라도 더 고심하게 만든다. 공을 들이게끔 한다. 속내를 말하기로 한 거 더 말해보자면, 어쨌든 누군가 읽어줄지도 모르니까, 그러길 바라니까 여기에 쓰는 거다. 누가 읽어주면 좋겠어. 그런데 그런 마음이라면, 더 솔직해져야 하는 거 아니니. 쓰고 있는 글 앞에서 얼마나 솔직했니. 진짜의 나를 여기 이 모두가 보는 곳에 데려올 수 있겠니. 끄집어낼 수 있겠니. 물음 앞에 호쾌하게 답을 하기가 참 어렵다.
글을 쓸 때 툭하면 ‘솔직히 말하면’이라고 적고는 한다. '솔직히 말하면'이라고 쓰면서 정말 내 글은 솔직했나. 얼마나 많은 거름망을 거치고 거쳤던가. 때깔 좋게, 그럴싸하게 보이려 내 글에 화장하고 포장했던 순간들이 스쳐간다. 무슨 배짱으로 ‘솔직히 말하면’이라 했던 건가. 그래도 이 글만큼은, 꽤 애썼다. 나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솔직해지는 것에 ‘선뜻’이란 말을 붙이기가 영 쉽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솔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