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흐린 눈을 하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흐린 눈이냐고 하면, 구질구질함. 그래, 나는 구질구질함에 대해 흐린 눈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현관을 청소했다. 그냥 대충 벅벅 닦은 수준이라 청소라는 거창한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무안하지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니 그냥 청소라고 하자. 이 집에서 산 지 거의 4년이 다 되어가는데, 현관을 청소한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는 나의 지저분함에 기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바깥에서 신고 온 신발로 바로 다시 더러워질 텐데 현관을 굳이 청소해야 하나, 집만 깨끗하면 됐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집 안이 깨끗한 것도 아니지만.) 신발에 묻은 눈이 녹으면서 구정물로 너저분해진 꼴을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현관은 청소된 적 없는 날을 새로이 갱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꺼멓게 질척대는 녹은 눈을 닦고, 한 번 닦은 자리를 다시 한 번 더 닦아내고, 구석구석의 먼지들을 훔쳤다. 그렇게 현관을 청소하고 나니, 현관문에 묻은 얼룩이 보였다. 존재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 크게 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거슬리지도 않아서 신경 끄고 지냈던 게 새삼 눈에 들어왔다. 걸레를 들어 문에 묻은 얼룩을 지웠다. 그랬더니 이번엔 문 바깥쪽의 얼룩이 생각났다. 밖으로 나가 그 얼룩도 닦아냈다. 그랬더니 비밀번호 패드 위에 오래 쌓여있던 먼지가 기억났다. 그 먼지도 닦아냈다. 4년을, 거의 4년을 알지만 모른 척해온 지저분함이었다. 얼룩은 저 혼자 지워지지 않았다.
잠시 소설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 <달까지 가자>는 가상화폐를 소재로 삼은 소설이지만, 유독 내게 강한 잔상을 남긴 건 이더리움이라든가, 투더문이라든가, J커브 곡선 같은 것이 아니라, ‘턱’이었다. 주인공이 사는 자취방에는 두 개의 턱이 없다. 현관과 방 사이의 턱, 방과 화장실 사이의 턱. 현관의 흙먼지가 방 안으로 굴러들어오고, 화장실의 물이 생활공간으로 침범한다, 단 몇 센티 높이의 턱이 없어서. ‘고작’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별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함의 부재가 주인공의 삶을 지긋지긋하게 만든다. 소설을 읽으며, 남들 다 아는 큰 회사에 다니는 이 사람이 이런 집엘 산다니, 코딱지 만한 회사에서 코딱지 만한 월급을 받는 나는 현관에도 화장실에도 턱이 있는 집에 사는데, 라며 소설 속 허구의 인물에게 일종의 우월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건 애잔한 자기위안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 ‘턱’이 신경쓰였던 건, 일종의 동질감 때문이었으니.
내가 지내고 있는 원룸 구석에는 옵션으로 원래부터 있던 작은 옷장이 하나 있다. 나는 그 옷장 뒤편 벽에 곰팡이가 피어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꽤 오랫동안 흐린 눈을 하고 있다. 마치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처럼.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되레 의식하고 말지만, 그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의식하고 마는 마음조차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그것의 존재를 부정해내려 한다. 그리고 부정하려 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그것에 대한 긍정임을 마지못해 인정하긴 하지만, 그조차도 모르는 체하려 한다.
현관을 청소하지 않았던, 현관문의 얼룩을 닦지 않았던 것도 사실은 그 연장선일 것이다. 내 생활 영역 안에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 돌리고 싶어서. 없는 것처럼 굴면, 없는 것이라도 되는 것마냥. 문지르고 문질러서 시꺼멓게 묻어 나온 것을 봤을 때, 그리하여 그 자리가 멀끔해진 걸 봤을 때, 나는 내 마음이 다소 개운해졌음을 느꼈다.
상주해 온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내 마음 안에 눌러앉아 있던 것을 직면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적확한 명명이었다. 2021년 한 해, 나를 장악한 감정은 내 삶의 구질구질함을 견딜 수 없는 데서 태어난 비참함이었다. 아니다, 정확히는 내 지난 삶을 장악해온 것이었다. 나를 잠식한 비참함과 그 비참함에서 파생된 또 다른 감정들 혹은 비참함으로 귀결되는 감정들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해소에 이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많은 것들을 해봤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건 상황의 변화나 행동의 실행을 통해 해결될 수 없었다. 본체를 두고 그림자를 바꾸려는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나는 내 마음으로 직접 들어가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이 길을 먼저 지나온 많은 이들이 말했듯,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느껴줘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닦아야만 그제야 비로소 닦여나간다.
새해의 목표는 매일 일기 쓰기이다. 일기를 들춰보니 벌써 이틀은 빼먹었다. 아직 1월인데 이미 목표 실패라고 하면 속이 상한다. ‘매일’은 너무 장엄한 목표인 것 같으니 앞에 ‘얼추’라는 부사를 붙이는 걸로 하겠다. 얼추 매일 일기 쓰기. 길게도 필요 없고, 글씨도 안 예뻐도 상관없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서술할 것도 없고, 아주 단순하게, 내가 오늘 무슨 기분이었는지 그것만 쓰자고 다짐했다. 없는 것처럼 한다고 없게 되는 게 아니라면, 최소한 있다고 인정은 하려 한다. 나는 이 꼴 보기 싫은 얼룩을 어찌 됐든 보기로 했고, 이걸 닦아내야 하는 것도 내 몫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