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일처리를 완벽까지는 못하더라도 흠 잡히지 않도록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탓에 어떤 때는 워크홀릭이라는 소릴 듣기도 한다.
별로 가진 것 없이 태어났기에, 자칫하다가는 순식간에 도태되고 뒤처질 거라는 불안감도 가지고 있다.
운보다는 내가 퍼부은 시간과 노력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최선이 최고의 결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도 열심히 달려야겠구나, 하고 스스로를 부추긴다.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강박도 가지고 있어서 취미 생활도 얌전히 누워 뭘 보면서 힐링하기보다, 뭔가를 만들거나 운동 등 뭔가를 하는 것에 취중 되어 있다.
아이 둘을 가진 부모인 까닭에 그 시간마저 나를 위해 온전히 투자하지 못하고, 쪼개서 사용한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라면 다들 그렇겠지만, 퇴근을 하면 집으로 새로 출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보통 그렇게 매일이 지나간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의 등교 준비를 돕고, 바로 일을 시작하고, 회의와 업무에 저녁까지 시달리다가, 회사 컴퓨터에서 로그아웃 하고 나면, 엄마라는 직업을 가지고 출근한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 학교 일을 해결하거나 숙제를 봐주고, 잠자기 전에 시간을 쪼개서 좀 쉰다 싶으면 어느덧 자야 하는 시간이 된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일상은 별로 다를 것 없이 굴러간다.
그 외 자잘하게 이런저런 일이 끼어들긴 하지만, 그래도 큰 틀은 유지된다.
직장에서의 나와, 엄마/아내로서의 나는 별로 다르지 않다.
부부인 우리는 작은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공동 경영인과 같은 자세를 유지한다.
둘 사이에서 자잘한 업무 분담이 이루어지고, 서로의 칼렌더를 공유하고, 주방을 바꾼다던지 하는 건 거대한 프로젝트로 따로 관리한다.
주방 계약서, 디자인 도안 같은 것들이 공유폴더에 저장되고, 우리는 시간을 내서 그걸 따로 검토한 뒤 같이 만나 서로의 의견을 조율한 뒤 결정을 내린다.
어디 출장 갈 일이 있으면 미리 메신저로 서로의 일정을 확인하고, 그 뒤 공유 칼렌더에 올리는데, 아이들 학교 행사들도 다 미리 저장해 두고 역할을 나눈다. 이 날 음악회는 당신이 가고, 이 날 수련회 참가는 내가 갈게, 뭐 이런 식으로.
어쩌다 보니 가족 간의 일을 결정하는 것에도 남편과 나는 일 할 때의 방식을 고대로 가지고 와서 사용하는 셈이다.
톱니바퀴 맞물리듯 그렇게 돌아가는 일상인데. 그게 가끔 한 번씩 삐그덕 거릴 때가 있다.
남편의 톱니에 과부하가 걸릴 때는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을 때다.
내가 일의 우선순위를 페이지 별로 나눠서 기입하는 타입이라면, 남편은 한 페이지에 모두 나열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다음 달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10개라고 치면, 그게 내 머릿속에는 데드라인 순으로 이번 주 토요일의 일은 페이지 1에, 다음 주 금요일의 일은 페이지 2, 이런 식으로 3-4장으로 나누어져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걱정을 페이지 별로 그때그때 닥치면 하고, 일처리의 속도도 그와 비슷하다.
그런데 남편의 머릿속에는 그 열 가지 일이 모두 한 페이지에 주욱 길게 나열되어 있기 때문에, 마지막 일에 체크가 될 때까지는 한 달 동안 계속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거다.
둘 사이의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는데, 내 방식의 장점이라면 스트레스를 미리 받지 않는다는 거고, 그의 방식이 가지는 장점이라면 일의 추진력을 높인다는 거다. 단점이라면 내 방식이 그의 스트레스를 돋운다는 거고 (자기는 스트레스받아 죽겠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니, '나만 신경 쓰고 너는 관심도 없구나'하는 식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내 입장에서는 그의 방식이 도리어 내게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
이런 문제는 내가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면 미리 예방할 수 있긴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To do 리스트에 남편의 상태를 확인하고, 종종 질문해 주기', '일처리의 마감일을 내 원래 기준보다 앞당겨 기입하기' 등을 따로 저장해야 한다는 거지만. (안 그러면 또 잊어버리고 원래 방식으로 돌아간다..;;)
내 톱니에 과부하가 걸릴 때는 바로 쫓기는 기분이 들 때다.
일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건 상관없다. 짜증이 나긴 하지만 해결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그런 날이 있다.
안 그래도 회사에서 일을 얼른 해결하라고 쪼아대서 미친 듯이 하고 있는데, 남편이 와서 아직도 안 끝났냐고 묻는다.
어, 미안, 이거 오늘 안에 해결해야 돼서. 얼른 끝낼게.
남편은 알았다고 말한 뒤 내려가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나면 남편이 아이들과 나를 부른다. 보통 이때쯤 일이 끝나면 다행이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서 계속 이메일을 확인하고 늦게 회의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와서 아빠가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했다며 나를 조른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지금은 안 되겠으니 나중에 먹겠다고 돌려보낸다.
그렇게 일을 겨우 마치고 녹초가 된 채로 내려온다.
남편과 아이들은 저녁을 다 먹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는 중.
이제야 저녁이라도 먹겠구나, 싶어 자리에 앉았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한 마디씩 해댄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빠서 밥 먹으러 내려오라는 것도 못 듣고 일을 해야 했느냐고. 엄마는 왜 그렇게 일이 많냐고, 우리 보고는 식사 때가 되면 바로 내려오라고 그러면서 엄마는 왜 지키지도 않느냐고.
처음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지만, 나중에는 확 짜증이 올라온다.
또 왜, 뭐!
나보고 뭘 더 어쩌라고?
지금 내가 좋아서 일을 이 시간까지 한 건 줄 알아? 지금 밥도 못 먹고 지친 게 누군데, 왜 나한테 다들 이래!
그렇게 일에서도 쫓기고, 가족들에게도 쫓기고, 집안일에도 쫓기고, 스트레스가 한도까지 차올랐는데 그걸 풀 시간까지 없을 정도로 내몰릴 때. 그때 내 톱니는 과부하가 걸려 삐걱댄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 뒤 비슷한 일이 또 생길 것 같으면 미리 가족들에게 경고를 하긴 한다.
지금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고, 충분히 스트레스받고 있고, 당신들 (남편과 아이들)에게 신경을 못써줘서 정말 미안하다. 이 일이 해결되면 충분히 시간을 낼 테니, 그전까지는 내게 부디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뭐.. 그게 먹힐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다. 그래도 중요한 건 과부하가 오는 지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거겠지.
....
워라밸 (Work Life Balance)
요즘은 정말 그게 뭔가 싶네요..